▲기쿠지로의 여름메이킹필름
튜브엔터테인먼트
무엇을 판단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도, 또 주변 이들에게도 판단의 중요성을 독려하고 나누기를 즐긴다. 그러나 그 판단 가운데는 언제나 걸맞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치열하게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로부터 판단하는 일이 관점이며 사상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노력이 나와 내 주변 이들을 발전시키고, 더 나은 관계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그러한 노력으로부터 우리는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를 조금 더 낫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없는 판단은 어떠한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이해 없는 판단이 범람하지 않는가. 불특정 다수가 삿된 의견과 감정을 뒤섞어 터뜨리는 온라인 공간은 이해 없는 판단이 판을 치고 있다. 뿐인가. 공적 여론을 형성하는 정치와 언론, 사법의 장 가운데서도 누구를 이해하려는 진득하고 치열한 마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해와 판단이 무엇인지를, 그 상관은 또 어떤 것인지를 숙고하지 않은 채 쉬이 판단하고 결론짓기를 즐기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일수록 제 판단을 돌아보지 않으니, 이해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나의 눈에 <기쿠지로의 여름> 속 이해가 빛나는 것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이들 가운데 쉰두 살 아저씨(기타노 다케시 분)의 캐릭터를 불편해한 이가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그는 어찌어찌하여 아홉 살 소년 마사오를 그 엄마에게 데려다주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그가 이 아이를 어찌 대하는가. 약속한 엄마의 집이 아닌 경륜장으로 끌고 가 번호를 찍으라고 독촉한다. 소년이 찍은 번호가 아쉽게 빗나가길 반복하자 거친 말씨로 분노를 터뜨린다. 밤엔 아무렇지 않게 술집에 들른다. 아이는 술집에 출입할 수 없으니 밖에 세워두고서 저 홀로 들어가 맥주를 들이킨다. 불편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택시 기사로부터 자동차를 훔치고, 낯선 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반건달, 양아치, 사회의 쓰레기, 그밖에 온갖 욕설이 날아들 수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그를 그저 구제 불능의 쓰레기로 남겨두지 않는다. 조금씩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살핀다. 마사오가 제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그에게도 어머니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사연이 있었음을 보인다. 평범한 관객이 이 세상 가운데 돌아보지 않을 만한 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그 역사와 현재를 가만히 살핀다. 마사오의 여정인 줄만 알았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다케시가 연기한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해만 있다면, 오로지 이해가 있다면 달라질 수 있는 게 있으리란 걸 <기쿠지로의 여름>은 보이는 것이다.
나이 든 이에게도 성장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