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지로의 여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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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영화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 있다. <기쿠지로의 여름>이다. 제목에서부터 '여름'이 들어가거니와 영화 속 OST가 영화만큼, 아마도 그보다 더 유명해진 탓도 있을 테다. 덕분일까. 이 영화는 무려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무더위가 조금 수그러든 어느 날, 참석한 한 영화모임에서 이 영화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데는 아마도 이러한 이유가 자리할 것이다.

앞에 언급한 OST를 궁금해할 이도 있을 것이다. 히사이시 조의 'Summer'다. 영화가 제작된 1999년 일본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건 물론, 국내외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오리지널 스코어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Summer'는 발표 후 20년이 넘도록 한국에서 각별히 인기 있는 피아노 연주곡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오리지널 스코어, 즉 영화를 위해 작곡되고 삽입된 음악을 논할 때 'Summer'를 언급하길 즐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곡을 들을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풍경이 영화의 이미지, 또 주제의식과 긴밀히 엮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이 곡을 들어보라. 어떤 광경이 펼쳐지는가.

인적 드문 한적한 시골길,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걸어 앞으로 나아간다. 때는 풀벌레 우는 한여름, 그러나 덥거나 짜증이 나진 않는다. 길 양편에 키 큰 나무들이 늘어서 걷는 이 머리 위로 선한 그늘을 드리워준 덕분이다. 선선한 바람, 가벼운 걸음, 멋진 산책이다. 다정한 그늘 덕분이다.

말하자면 <기쿠지로의 여름>이 그런 영화다. 누구에게건 그늘이 필요하다. 삶은 때로 지나치게 버겁다. 올여름 닥쳐온 무더위처럼, 당장 어디 늘어지듯 쓰러지고픈 마음이 들도록 한다. 엉엉 울고픈 순간이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쏟는 날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울음이 아니다. 그다음이다. 울고 나서 안길 가슴이, 등을 기댈 누가 있는지다. 한여름 그늘 같은 관계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 정말이지 그 정도의 공평함은 있어야만 한다.

공평치 못한 세상, 어디에나 외톨이는 있다

기쿠지로의 여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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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이 그렇지 못하단 걸 안다. <기쿠지로의 여름> 속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 분)도 그렇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마사오다. 어머니는 먼 곳에 돈을 벌러 나갔다고 하고, 아버지 소식 또한 알지 못한다. 저를 키운 할머니도 일하느라 바쁘기만 하니, 마사오는 자주 외톨이가 된다. 학기 중이라면 친구가 있겠지만, 방학은 다른 이야기다. 모두가 방학을 기다린다 하지만, 방학이 끔찍이도 싫은 이가 바로 여기 있다.

영화는 마사오가 외톨이가 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방학이 되고 친구들은 죄다 가족들과 휴가를 떠난다. 바다로, 시골로 간 친구들의 빈자리가 어찌나 컸던지, 마사오는 세상 모두를 잃은 아이의 표정이 되어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엄마의 흔적, 서랍 안엔 엄마의 사진과 주소가 있다. 일기장과 방학숙제를 조막만한 배낭에 담고 엄마 찾아 떠나려는 아홉 살 소년. 아이와 쉰두살 동네 양아치 아저씨의 동행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1999년, 서정적이면서도 날 것 그대로의 그 시절 일본영화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이다. 코미디언 출신 만능 엔터테이너로, 인간 내면 깊은 곳을 자극할 줄 아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다. 제 색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다케시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유달리 감상적이고 다정한 작품이 <기쿠지로의 여름>이라 하겠다.

이 영화에서 각별히 언급하고 싶은 대목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해', 다른 하나는 '성장'이라 표현하면 꼭 맞을 것이다.

먼저 이해다. 영화는 타인을 이해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이해란 무엇인가.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가 최근 십수 년 간 빠르게 잃어버린 가치가 바로 이해가 아닌가 싶다. 이해하려는 의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각오, 이해하길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 그와 같은 것이 이 사회에선 실종되어 버린 게 아닌가 그렇게 느낄 때가 적잖다.

이해 없는 판단이 넘실대는 세상에서

기쿠지로의 여름 메이킹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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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판단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도, 또 주변 이들에게도 판단의 중요성을 독려하고 나누기를 즐긴다. 그러나 그 판단 가운데는 언제나 걸맞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치열하게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로부터 판단하는 일이 관점이며 사상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노력이 나와 내 주변 이들을 발전시키고, 더 나은 관계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그러한 노력으로부터 우리는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를 조금 더 낫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가 없는 판단은 어떠한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이해 없는 판단이 범람하지 않는가. 불특정 다수가 삿된 의견과 감정을 뒤섞어 터뜨리는 온라인 공간은 이해 없는 판단이 판을 치고 있다. 뿐인가. 공적 여론을 형성하는 정치와 언론, 사법의 장 가운데서도 누구를 이해하려는 진득하고 치열한 마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해와 판단이 무엇인지를, 그 상관은 또 어떤 것인지를 숙고하지 않은 채 쉬이 판단하고 결론짓기를 즐기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일수록 제 판단을 돌아보지 않으니, 이해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나의 눈에 <기쿠지로의 여름> 속 이해가 빛나는 것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이들 가운데 쉰두 살 아저씨(기타노 다케시 분)의 캐릭터를 불편해한 이가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그는 어찌어찌하여 아홉 살 소년 마사오를 그 엄마에게 데려다주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그가 이 아이를 어찌 대하는가. 약속한 엄마의 집이 아닌 경륜장으로 끌고 가 번호를 찍으라고 독촉한다. 소년이 찍은 번호가 아쉽게 빗나가길 반복하자 거친 말씨로 분노를 터뜨린다. 밤엔 아무렇지 않게 술집에 들른다. 아이는 술집에 출입할 수 없으니 밖에 세워두고서 저 홀로 들어가 맥주를 들이킨다. 불편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택시 기사로부터 자동차를 훔치고, 낯선 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반건달, 양아치, 사회의 쓰레기, 그밖에 온갖 욕설이 날아들 수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그를 그저 구제 불능의 쓰레기로 남겨두지 않는다. 조금씩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살핀다. 마사오가 제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그에게도 어머니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사연이 있었음을 보인다. 평범한 관객이 이 세상 가운데 돌아보지 않을 만한 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그 역사와 현재를 가만히 살핀다. 마사오의 여정인 줄만 알았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다케시가 연기한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해만 있다면, 오로지 이해가 있다면 달라질 수 있는 게 있으리란 걸 <기쿠지로의 여름>은 보이는 것이다.

나이 든 이에게도 성장은 있다

기쿠지로의 여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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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성장 또한 이와 맞닿는다. 영화의 승부수는 결말에 있다. 아이의 이름이 마사오란 걸 알면서도 영화를 보는 많은 이가 그가 기쿠지로이기도 하리라고 여긴다. 그건 '누구누구의 여름'이란 제목이 쉰두 살 반건달보다는 아홉 살 어린이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마지막 순간, 여정의 끝에서 아이는 어른의 이름을 묻는다. 그 뒤늦은 물음과 답 뒤에야 우리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마사오가 아닌 기쿠지로, 나이 든 사내임을 알게 된다. 일대 전환이다. 아무렇지 않은 반전이다. 기쿠지로는 이 좌충우돌 빛나는 여름의 주인이 된다.

통상 성장은 아이, 또 한창 자라는 성장기며 청춘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나이 든 이에게도 성장의 기회는 열려 있는 것이다. 동네 양아치로, 누군가 제 가족사를 물으면 덮어놓고 화부터 내던 사내가 마침내 제 어머니를 찾는 용기를 낸다. 마사오와의 여정이 아니었다면 결코 없었을 변화, 곧 성장이다. 제 나이에 맞는 책임을 감당하여, 배고픈 아이에게 주먹밥 두 개를 내주고 저는 하나를 가져다 먹을 줄 안다. 얻어맞으면서도 아이를 생각하여 돌아갈 수 있기를 청한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케시의 집요한 배려 덕분에 관객은 비로소 이 험악하고 거친 사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에게 기회를 허한다. 이해가 없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판단하기만 하는 이는 일찌감치, 그러니까 앞의 경륜장이며 자동차 절도며 또 다른 몇몇 순간에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을 테다. 그런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이해가, 치열한 이해가 판단에 선행해야만 한다.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 판단하는 이의 전제다.

이해와 성장을 담은 이 영화는 마침내 관계에 닿는다. 마사오와 기쿠지로, 또 그들이 여정 가운데 만난 얼빠지고 투박한 이들의 관계 말이다. 그와 같은 관계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한여름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늘처럼, 애정 어린 관계만 주어진다면 아무리 더운 날씨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 것이다. 펑펑 울고 난 뒤 안길 가슴이 있다면, 기댈 어깨가 있다면, 그렇다면 달라진다. 마사오가 이름 모를 변태에게 끌려간 순간을 끔찍하게 떠올리지 않을 것처럼. 그를 구해준 기쿠지로를 떠올릴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그런 관계쯤은 모두에게 공평했으면. <기쿠지로의 여름>을 지낸 뒤 기대하는 건 그런 것이다. 기쿠지로를 만나기 전의 마사오, 마사오를 알기 전의 기쿠지로는 너무 슬프니까. 다시 눈을 감고 히사이시 죠의 'Summer'를 듣는다. 화창한 여름, 그늘진 길을 걸으며 선선한 바람을 맞는다. 그곳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다가서지 못할 일이 없다.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여름이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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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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