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김수철(왼쪽)
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김수철(왼쪽)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지난 6월 둘째 주, 강원도 철원군의 고석정 일대는 독특한 옷차림과 깃발 부대, 그리고 음악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2018년부터 열리고 있는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이하 피스트레인)'이 열렸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의아한 일이다. 철원은 '뮤직 페스티벌'이 열릴만한 곳으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근거리에 북한을 두고 있는 철원은 군부대와 안보 같은 단어를 의례 소환한다.

그런데 피스트레인은 이 독특한 입지적 조건을 페스티벌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분단의 상흔이 남아있는 최전방 지역에 지난 수년간 부지런히 평화와 음악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자연 풍경과 먹거리. 이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치밀한 기획과 어우러지면서 멋진 시너지를 만들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두 번의 취소, 지자체 예산 삭감 등 여러 위기를 겪고도 이 페스티벌이 음악 마니아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는 이유다.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에 오른 밴드 실리카겔
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에 오른 밴드 실리카겔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춤을 추고 바라만 봐도(Dance on, Gaze on)를 키 메시지로 삼은 올해, 이번에도 철원에서는 멋진 순간이 여럿 탄생했다. 페스티벌의 피날레를 장식한 거장 김수철이 대표적이다. 김수철을 생소해했던 젊은 세대 관객들은 김수철이 '정신차려', '젊은 그대', '치키치키차카차카초'처럼 수십년간 대중과 함께 해 온 명곡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1957년생 거장의 기타 연주는 여전히 대한민국 으뜸이었다. '모두 다 사랑하리(송골매)'의 후반부 솔로 연주는 경외감마저 자아냈다. '왜 이렇게 위대한 기타리스트를 여태 몰라 보았을까'라는 일부 관객의 자책도 들을 수 있었다. 김수철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객들에게 '작은 거인'은 연주를 마치자마자 "열심히 하겠습니다. 얼굴은 동안인데 연식이 조금 있다"며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밴드로 우뚝 선 실리카겔은 지난해에 이어 다시 피스트레인에 출연했다. 강렬한 드라이브감의 'APEX'로 문을 열었고, Z세대 록팬의 찬가가 된 'No Pain'은 관객들을 연대감으로 끌어안았다.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라는 가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모든 관객을 연대하게 할만큼 울림이 컸다. 실리카겔은 최근 올랐던 다른 페스티벌보다 더 다채로운, 단독 공연에서 보여줄법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이센스는 장영규, 박문치, 진실 등 화려한 밴드 멤버를 대동한 채, 자신이 한국 힙합 최고의 래퍼라는 사실을 거뜬히 입증했다. 최근 신보를 발표한 한로로는 해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신예의 모습을 드러냈다. 밴드 미역수염의 거친 디스토션은 구름이 잔뜩 드리운 날씨와 어우러졌다. 스네이크 치킨 수프가 공연할 때는 수많은 관객의 '슬램'과 함께 영화 <매드맥스> 같은 모래바람이 만들어졌다. 공연을 즐기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무대를 잠시 뒤로 하고 철원의 계곡 풍경을 만끽하는데, 멀리서 9m88이 RM의 신곡 'Come Back To Me'를 부르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피스트레인은 상업성과 안정성 대신 다양성에 집중한다. 최근 스페인 프리마베라 사운드 등 세계적인 페스티벌 무대에 초대받은 '얼터너티브 케이팝' 그룹 바밍 타이거가 좋은 예다.  이들은 힙합과 록의 태도를 자연스레 오가며 관객을 압도했다. 백현진과 장영규의 어어부 프로젝트 역시 공연 내내 일련의 전형성을 거부했다. 대만의 9m88, 영국의 포리지 라디오(Porridge Radio), 일본의 노 버시즈(No Buses), 프랑스의 뮬(MEULE)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씬(Scene)을 부지런히 소개했다.

한편 일요일 아침 철원 수도국 터에서는 스페셜 공연 '해소되지 않는 침묵'이 열렸다. 한국전쟁 당시  수백 명이 학살당한 수도국 터에서 포크 뮤지션 이민휘, 그리고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씨피카와 낸시보이, 김도언이 공연을 했다. 관객들이 숙취에서 덜 깼을법한 아침, 이들의 음악이 산바람, 풀냄새, 새소리, 비극의 역사와 상호작용했다. 특히 씨피카, 낸시보이, 김도언의 공연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을 불러내고, 애도하는 '일렉트로니카 제례악'으로 완성되었다. 어떻게 하면 음악이 '다르게 들릴 수 있는가'에 대한 주최 측의 고민이 돋보였다.

서로에게 선을 긋기 전에 함께 춤을 추자
 
 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의 분수대 무대에서 춤을 추는 관객들
2024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의 분수대 무대에서 춤을 추는 관객들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철원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피스트레인은 수도권에서 열리는, 접근성이 좋은 피크닉형 페스티벌의 반대편에 서 있다. 오고 가는 길은 고된 편인데, 대중에게 생소한 뮤지션들이 라인업에 가득하기까지 하다(실제로 이 페스티벌은 '음악 마니아가 인정하는 페스티벌'을 추구하고 있다). 피스트레인에는 국내 락 페스티벌은 물론 영국 글래스톤베리 등 세계적인 뮤직 페스티벌을 섭렵한 고관여층 관객, 이른바 '페스티벌 고어(festival goerer)가 어느 곳보다 많다.

하지만 이곳은 결코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니다. 행사장 옆 꽃밭을 보러 온 노인, 철원군의 군인, 이 지역에 사는 10대 청소년, 어린이, 지역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상인, 성소수자 연인이 공존한다. 철저히 단절되어 있던 세계가 조우한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관객들은 기차놀이를 하며 서로의 어깨를 내어준다. 그래서 티켓을 사지 않은 사람들도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분수대 앞 디제이 스테이지는 이 페스티벌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관객들은, 다양한 음악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고 즐긴다. 실리카겔이 공연을 이어가던 중, 프론트맨 김한주가 5분 동안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는 것도 결코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기획과 장소, 그리고 관객의 관용적 태도가 함께 일궈낸 승리다.

"All we are saying is give peace a chance."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평화에게도 기회를 주라는 거야.)
- 'Give Peace A Chance' 가사 중에서


마지막 순서인 김수철의 공연이 마무리되고, 존 레넌의 노래 'Give Peace A Chance'가 행사장에 울려 퍼졌다.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될 당시 한반도에 고조되었던 훈풍은 완전히 사라졌고, 오물 풍선 등 험악한 뉴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20세기에나 존재했던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음악은 하루의 평화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피스트레인은 연대와 사랑, 평화 같은 단어를 믿고 싶게 만드는 곳이다. 찰나의 평화를 통해,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음악과 춤의 존재 이유는 그런 것이다.
DMZ피스트레인 피스트레인 김수철 실리카겔 이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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