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가장 애정하는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신작이 개봉한다는 소식에 올해 들어 가장 크게 들떠서는 극장으로 달려온 걸음이었다. 영화 시간이 조금 남아 대기하고 있던 중 친구로부터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누군가의 부고가 실린 한 토막 기사 링크였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시절 처음 접했던 어느 어른이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신문을 읽지 않았다. 이제 신문에는 멋진 문장을 쓰는 이도, 시대를 앞서 민중을 이끌만한 이도, 탁월한 이도, 치열하게 부닥치는 이도 없지 않느냐고 나는 무엇도 제대로는 알지 못하는 애송이의 치기로써 외면하고 지내었던 것이다. 도서관에 틀어박혀서는 이미 죽어버린 작가의 글들만 탐독하면서, 이제 이 세상에는 읽을 만한 글도 배울만한 어른도 모조리 멸종되고만 것이 아니냐며 혐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는 하였다.
 
그때 친구가 건넨 건 어느 신문에서 오려낸 칼럼 하나였다. 네 말대로 멋진 언론도 탁월한 기자도 없는 건지 모르겠다. 너도 나만큼 많은 글을 읽었고 신문 또한 열심히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 허접한 신문에도 가끔은 이런 글이 실려.
 
그렇게 받아든 것이 한국 교육의 야만성을 일깨우는 한 편 칼럼이었다. 하루 열댓 시간씩 공부만 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의 이야기로부터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만 양산할 뿐인, 노름판이며 장사판으로 전락하고만 한국의 교육현실을 맹렬히 질타하는 글이었다. 얼마나 통렬했는지! 어찌나 출중했는지!
 
 영화 <위험한 아이들> 포스터
영화 <위험한 아이들> 포스터부에나 비스타 픽쳐스
 
야만의 시대에도 어른은 있다
 
그로부터 나는 이 세상에 제대로 보고 멋지게 쓰는 이가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따금 신문에 실리는 그의 칼럼을 찾아보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의 위험을, 그 위협 아래 쉽게 무릎 꿇는 이 시대 보통의 인간들을, 그 침몰에 저항하며 거듭 패퇴하는 지식인의 절망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건 얼마나 무참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나.
 
<위험한 아이들>을 찾아본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함께 모여 감명 깊게 읽은 것을 서로 나누던 친구들과 내가 그 어른의 글로부터 읽어낸 것을 나누고자 함이었다. 존 N. 스미스가 연출하고 미쉘 파이퍼가 주연한 1995년 작 영화는 무너져가는 미국 공교육과 그 현장에서 결코 무너져선 안 될 것을 지탱하려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루앤 존슨(미쉘 파이퍼 분), 9년 간의 미국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캘리포니아 북부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받는 중이다. 정교사 자격 취득을 목표로 하는 그녀에게 떨어진 업무는 아카데미 클래스라 불리는 문제아 학급의 담임이다. 아카데미 클래스, 그건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아이들이 모인 집단이다. 학교가 수련이 안 된 교생에게 그 학급의 담임을 맡긴 데는 그런 연유가 있다. 어차피 교육되지 않는 아이들, 숙련된 교사는 가망이 있는 아이들에게 붙이는 게 이 학교의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위험한 아이들> 스틸컷
<위험한 아이들> 스틸컷부에나 비스타 픽쳐스
 
분노와 반항... 그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내다
 
열의에 찬 루앤의 눈에 들어온 건 아카데미 클래스 학생들이 처한 상황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분노에 차 있고 반항할 기회만 노리는 작은 악당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찬찬히 뜯어보면 저마다 좋지 않은 가정형편 속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을 만나지 못한 채로 고립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루앤은 전공인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으로, 학생들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에게 불친절한 정규교과 수업이 먹힐 리 만무하다. 루앤은 과감하게 새로운 교과과정을 짜고 친근한 교수법을 시도한다.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법한 밥 딜런으로부터 딜런 토머스의 강렬한 시까지 차츰 문학의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는 솜씨는 제법 멋드러진 것이다. 교육을 억압으로 여기면서도 저의 실패는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헛된 저항을 루앤은 진심을 다하여 조금씩 무너뜨려간다.
 
마침내 하나하나 아이들이 스스로를 믿고 서로를 의지하며 일어서는 과정은 차라리 감격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도록 가르친다. 마침내 미숙한 노력을 성공해낸 이들에게 처음으로 A학점을 주고, 한 번도 답하지 않던 학생에게 답변을 이끌어낸다. 루앤의 교수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교 측의 압력도 없지 않지만 루앤은 오로지 진짜 교육을 위하여서 제 방식을 고수해나간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하는 순간까지 다가온다.
  
 <위험한 아이들> 스틸컷
<위험한 아이들> 스틸컷부에나 비스타 픽쳐스
 
빛의 스러짐에 저항하기
 
바로 그때, 학생들이 그녀를 붙든다. 그리하고는 말한다. 그녀가 목놓아 강의했던 딜런 토머스의 시 구절을 인용하여.
 
"도망치지 마세요. 빛의 스러짐에 대항해야죠."

"도망이 아니야. 내 선택이야. 그리고 난 빛의 스러짐에 대항해야 할 이유가 없어."

그러자 그녀의 학생이 답한다.
 
"대항하는 건 우리에요. 선생님이 우리의 빛이니까."
 
어두운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선 안 된다는 딜런 토머스의 싯구처럼 그들은 함께 어려운 환경을 맞서 싸우기로 결의한다.
 
영화의 후반부, 복도에서 였던가. 루앤의 친구가 그녀에게 묻는다.
 
"그 녀석들이 뭐라고 하면서 설득했지?"
 
루앤이 답한다.
 
"초콜렛을 줬어.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빛이래."
 
친구가 답한다.
 
"충분하군."
 
루앤 존슨과 그녀의 학생들은 그렇게 저의 빛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용감히 싸워 그를 지켜낸다. 빛의 스러짐에 대항하고 어두운 밤 속으로 들어서기를 거부한다. 세상에 이보다 나은 교육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한 아이들> 스틸컷
<위험한 아이들> 스틸컷부에나 비스타 픽쳐스
 
어른 홍세화를 떠나보내며
 
흔히 사람들은 홍세화를 '톨레랑스'(tolérance)를 실천하는 사회운동가로 기억하지만, 나는 그를 한국 교육의 야만을 통렬히 지적하던 탁월한 글쟁이로 기억한다.

그는 한국 교육의 야만성을 지적하는 어느 칼럼에서 "사교육비가 투자처럼 인식되는 사회에서 경쟁에서 이긴 자는 이긴 자로서 보상을 당연하게 요구하게 된다"며 "사회 상층에게서 사회적 책임의식이나 사회환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사회에 고마움을 표명하는 구성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교육제도와 현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지독한 경쟁을 부추긴 데서 온 결과"라며 한국의 교육현실이 소년노동을 부추기는 동남아의 그것보다도 천박하고 야만적이라 개탄했다.
 
구성원의 불안심리를 자극하는 야만적 장사판에서 학생들이 거듭 죽어가고 있음을, 대자연의 정서를 잃고 꿈을 잃고 망가져감을 비판했다. 사회 전체가 당장 달려들어 이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세상은 과연 그때와 달라져 있는가. 읽지 않고 사고할 줄 모르면서도 스스로가 무식하다 여기지 않는 젊음을 질타했고, 지배세력을 위해 작동하는 의식세계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아래 살아가는 이들을 일깨우고자 애썼다.

편견과 화해, 공감과 좌절, 슬픔과 극복이 엉켜 있는 희망적인 영화로부터 나는 오래 전 감탄하며 읽었던 그 어른의 문장들을, 또 흐릿해진 나의 각오를 되새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으로부터 나는 과연 스스로를 구해냈는가. 교육과 언론과 시장의 야만에 대항하여 나는 참말로 저항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린 내가 경멸하던 멍청하고 한심한 어른과 달라졌는가. 나는 빛의 스러짐에 대항하고 있는가. 글을 읽는 당신은 또 어떠한가.
 
홍세화, 향년 77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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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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