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제에서 모더레이터 제안을 해왔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 및 관객과 대화하는 GV행사 사회를 맡아달란 이야기. 평론가로 활동하며 여기저기 글 제안이며 강의는 꾸준히 맡아왔으나 모더레이터는 처음이다.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였다.
 
내가 맡은 세션은 영화제 마지막 날 오전이었다. 모두 세 편의 중단편 영화가 상영된 뒤 감독들과 대화를 진행한다. 세 편 영화 사이 특별한 공통점이 없다는 언질을 받았으나 가만 보니 은근한 공통점이 보이는 듯도 했다. 모두 사람 사이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란 것이었다.
 
오늘 '씨네만세'에서 다룰 영화는 세 편 중 처음 상영된 작품 <존엄을 외쳐요!>가 되겠다. 지역 공부방 아이들이 힘을 모아 제작한 동명 인형극이 연극제에서 수상을 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겼다.
 
교육과 돌봄의 공백으로부터
 
존엄을 외쳐요! 스틸컷
존엄을 외쳐요!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유독 이 영화가 반가웠던 건 전년도 보았던 어느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에 위치한 공부방의 이야기 <곁에 서다>가 바로 그 영화였다.
 
기찻길옆작은학교는 이촌향도와 도시화의 흐름 가운데 태동한 공부방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지역 공부방이다. 아이들의 부모가 일터로 나간 동안 쪽방에 남겨졌던 아이들에게 교육과 돌봄을 제공하는 운동을 지역 교육자며 활동가들이 이어왔던 터다.

고립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고 제도가 미처 해내지 못한 교육과 돌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을 이곳 교사들은 묵묵히 감내해왔다. 그 시간이 무려 38년이나 되었다. <곁에 서다>가 그린 건 공부방의 나날들, 제도권 바깥에서 매년 희망과 고난의 시간을 반복해 겪어내던 기찻길옆작은학교의 풍경이었다.

<존엄을 외쳐요!> 또한 기찻길옆작은학교의 이야기다. <곁에 서다>가 공부방 그 자체를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끌어갔다면, <존엄을 외쳐요!>는 그곳 아이들이 적극 참여해 인형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두 편을 모두 감독한 심상범은 주역들 가까이 다가서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인터뷰며 일상 다큐의 형식으로 잡아낸다.
 
아이들이 만든 인형극, 대상을 타다!
 
존엄을 외쳐요! 스틸컷
존엄을 외쳐요!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이야기는 어느 인형극 시상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대상의 주인공은 칙칙폭폭어린이인형극단, 전년도에 이어 연이은 수상이란다. 그로부터 다큐는 수상작 <존엄을 외쳐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차근히 소개한다. 말하자면 다큐 <존엄을 외쳐요!>는 동명 인형극의 메이킹 필름쯤이 되겠다.
 
인천 만석동에 위치한 기찻길옆작은학교가 다큐의 배경이다. 교사와 학생들이 만드는 극이 몇 달 뒤 춘천에서 열리는 인형극에 출품될 예정이다. 초등학생이 대부분인 아이들이 공부방 교사와 함께 역할과 배역을 나누고 소품을 만들고 합을 맞추어간다. 한 편의 인형극이 만들어지기까지 연기하는 배우와 목소리 내는 성우, 소품담당까지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대부분 초등학생인 어린 아이들이 저마다 역할을 맡아 극을 이루는 과정이 흥미롭다. 다큐는 그저 인형극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만 담는 게 아니다. 그 작은 가슴마다 호기심과 열정이 피어나는 모습까지 담는다. 저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아이들이 책임감과 협동심을 알아간다. 내가 잘못할까 두려운 마음이 책임감이 되고, 너와 내가 맞아떨어질 때의 짜릿함이 협동심이 된다. 그렇다. 어떤 미덕도 자연히 있는 게 아니다. 깨워지고 단련되는 것이다. 다큐 속 아이들에게 일어난 변화가 바로 그 시작이다.
 
빛나는 미덕이 피어나는 순간들
 
존엄을 외쳐요! 스틸컷
존엄을 외쳐요!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처음 합창을 하던 날이, 처음 계주를 뛰던 때가, 내가 무너지면 모두가 망쳐지는 그런 순간들이 말이다. 인간이란 함께 사는 것이어서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관계와 책임은 무거워져 간다. 그럴 때 문득 어릴 적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던 때가, 화음을 얹던 때가 떠오르곤 한다. 책임감과 협동심이 태어나고 자라나던 순간들 말이다.
 
그렇다면 다큐가 그 시작으로 시상식을 배치한 이유가 명백해진다. 통상의 영화라면 시상식은 가장 뒤에 배치할 터다. 이러이러한 어려움을 겪은 끝에 우리는 마침내 해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선택한 건 정반대의 길이었다. 대상을 받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그 전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럼에 이 다큐 안엔 어느 극단의 대상 수상작보다 더 멋진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두근거림이 부담감을 딛고 일어나 뿌듯함을 피워내는 순간 같은 것 말이다.
 
23분의 러닝타임 동안 들어찬 아이들의 목소리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듣기 어려운 것이다. 그 반짝이는 인터뷰들이 반짝다큐페스티발이란 영화제와도 꼭 어울린다 싶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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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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