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인사채용 부문에서 일하는 지인과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그는 면접 자리에서 관상을 보기로 유명한 어느 기업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내게 그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왔다.
 
누군가는 일생일대의 자리일 수도 있는 게 면접이 아닌가. 그런 면접에서 관상이며 사주처럼 비합리적 요소를 주요하게 판단해서야 될 일인가 말이다. 가뜩이나 외모부터 학벌과 가족관계까지 갈수록 많은 요소를 채용과정에서 판단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까지 각광받는 시기에 말이다. 나는 관상으로 사람을 뽑는 일을 결정하는 일은 잘못되었다 생각한다고 답을 내놨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 생각이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웬걸, 그는 기업가가 관상을 보는 기업이 외로 다른 여러 부문에서 열려 있는 일이 많았다고 말한다. 말인즉슨 인간의 이해로 닿지 못할 관상 같은 걸 의사결정에서 반영하는 기업가는 제 성공 가운데 실력보다도 운이 작용한 것을 크게 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성공 가운데서 운보다는 제 실력이 주효했다 여기는 이가 제 성공방정식이 어디에도 통하는 것인 양 여기는 사례도 있을 수 있다.
 
세상사가 그와 같아 어느 일이건 운과 실력이 함께 작용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중 운만 중시하고 계측 가능한 실력을 도외시한다거나, 반대로 실력만 중요하다 여기고 운을 배제하는 태도가 얼마나 많은가를 돌아본다. 예로 든 면접자리에서처럼 관상으로 사람을 뽑거나 차별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겠으나, 제 성공 가운데 운이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볼 수는 있는 것이다.
 
매치 포인트 포스터
매치 포인트포스터 글뫼㈜
 
명감독 우디 앨런의 도발적 상상
 
명성 높은 감독 우디 앨런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어떤 영화를 가리켜야 할까 생각해 본 일이 있다. 여러 작품이 논의될 수 있겠으나 <매치 포인트>를 빼면 섭섭할 밖에 없다. 그건 이 영화가 앨런의 독특한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기 때문이고, 또 그 밖에선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멋이 고스란히 녹아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얼핏 이야기는 그렇고 그런 흔한 로맨스 스릴러처럼 보인다. 남녀의 사랑을 다루어서 로맨스이고, 그 사랑 가운데 긴장이 거듭되어 스릴러라 하겠다. 인물들의 사랑은 그저 응원 받고 축복받을 그런 관계가 아니다. 어쩌면 처수님과 서방님 관계가 되었을 이들이 서로의 배우자 눈을 속여가며 관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아침드라마에나 볼 법한 막장영화가 아닌가 싶지만, 그 안에 삶에서 얻은 지혜가 녹아 있으니 그저 삼류 치정극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매치 포인트>는 테니스 강사 크리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분)의 이야기다. 한때 테니스 유망주로 촉망받던 그가 마침내 최고 반열에 진입하지 못한 채 영국 런던에서 부유층을 상대로 테니스를 지도하는 강사로 일한다. 크리스는 그곳에서 부유층 자제인 수강생 톰(톰 휴윗 분)을 만난다. 격의 없이 크리스와 친해진 톰이 어느 날 그를 제 가족에게 소개하니, 크리스와 클로에(에밀리 모티머 분)의 첫 만남이다.
 
매치 포인트 스틸컷
매치 포인트스틸컷 글뫼㈜
 
성공 꿈꾸는 남자의 위험한 연애
 
해맑고 정 많은 클로에는 첫눈에 크리스에게 호감을 보인다. 둘은 자연스레 만남을 이어가고 마침내 연인이 된다. 파티가 있던 어느 날인가, 클로에의 집에 초대된 크리스가 매력적인 여자를 만난다. 미국에서 온 배우지망생 노라(스칼렛 요한슨 분)로, 남다른 외모와 분위기에 크리스는 바로 빠져들고 만다.
 
그로부터 크리스의 위험한 사랑이 시작된다. 클로에의 아버지 덕에 큰 기업에 채용이 되고, 직원에서 임원까지 승승장구를 하는 그다. 자연스레 클로에와 결혼까지 앞둔 사이가 되지만 노라에게 받은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애가 좋은 톰과 클로에가 함께 자리를 자주 가지는 탓에 그 또한 노라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이야기는 한 순간에 급전된다. 크리스와 달리 노라는 톰의 집안에서 썩 보는 눈이 좋지 않다. 여배우를 꿈꾸는 모습부터 미국에서 나고 자라 생긴 태도까지 점잖은 톰의 부모에겐 탐탁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라가 싹싹하거나 공손하게 다가서는 것도 아니어서 이들이 모인 자리에선 끝이 좋게 끝나는 일이 드물 정도가 된다.
 
매치 포인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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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정극 넘어 영화적 깨달음에 가서 닿는
 
여느 날처럼 톰의 어머니께 싫은 소리를 들은 노라다. 바깥에는 비가 퍼붓는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그녀가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폭우 속에서 우산 없이 걷는 그녀를 크리스가 우연히 보게 되고 그렇게 둘은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서게 된다. 불안정한 기분과 쏟아지는 비, 한 남자의 위험한 감정에 이르기까지 피해야 할 것들로 가득한 이들의 관계가 시작되고 마는 것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클로에와 톰의 눈을 피해 관계를 이어가는 둘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크리스는 노라에게 온 정신을 바쳐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제게 부와 성공을 안겨줄 클로에를 포기할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크리스와의 사이에서 덜컥 아이가 생겨버린 노라가 그에게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할 때까지 크리스는 이 기묘한 관계를 그야말로 스릴 넘치게 즐겨나갔던 것이다.
 
우디 앨런은 이로부터 한 편의 치정극을 넘어서는 영화적 깨달음을 선사한다. 그건 다름 아닌 운에 대한 것이다. 앞서 예로 든 것처럼 세상 모든 것엔 운과 실력이 함께 작용하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천차만별이다. 어쩌다 한 번 있었을 제 성공을 만사에 통용된다는 듯 확신을 갖고 설파하는 이가 있고, 실력을 다하고 얻은 결과에 대하여도 천만다행이라며 겸손하게 감사하는 이가 있다.
 
매치 포인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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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우디 앨런의 일침
 
크리스와 톰, 클로에와 노라의 테이블 위에 운과 실력이 주제로 오르는 순간이 있다. 모두가 실력, 또 노력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크리스에겐 가당찮은 이야기다. 톰과 클로에처럼 다 가진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그는 부단한 노력에도 운이 없어 좌절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고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닌, 운이 따르지 않아 실패하게 되는 순간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크리스의 강변에도 톰과 클로에는 그를 알아듣지 못한다. 선 상황에 따라 풍경 또한 달리 보이게 마련인 것이다.
 
크리스가 우연히 다른 테니스 선수와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크리스의 전성기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크리스가 조금만 운이 따랐다면 좋은 선수가 됐을 거라고 말한다. 몇 번의 샷이 몇 센티미터 옮겨와 코트 안쪽으로 들어갔다면 그가 선 곳이 전혀 다른 곳이었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겐 운이 없었고 더는 선수로 테니스를 치지 못하게 되었다.
 
영화는 크리스와 노라의 관계 또한 운과 계획의 관계를 통해 풀어간다. 점점 급박해지는 상황 가운데 크리스가 내린 선택에도 운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초반의 테이블 장면, 중반에서 마주친 테니스 선수와의 대화에서 언급된 운이 영화 전체와 어우러지며 나름의 주제의식을 구현하기에 이른다. 이쯤되면 영화는 그저 한 편의 치정극으로 머물지 못한다. 테이스 경기의 마지막 한 점, 그 결정적 순간을 좌우하는 가장 중대한 요소가 바로 운이라는 사실을, 그 운이 인생과 어떻게 얽매일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내보인다.
 
우디 앨런은 <매치 포인트>를 통해 세상 어느 장르라도 제가 손을 대면 우디 앨런 식 재미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건 그대로 운과 상관없는 실력의 필요를 증명하는 것일 테지만, 그가 이렇게 운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 또한 그대로 흥미롭다. 어쩌면 이 영화에도 수많은 운의 요소가 작용한 것일지 모르겠다. 운을 대하는 누구의 태도를 읽는 것, 또 그로부터 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것이 이와 같은 영화의 미덕일 수 있을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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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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