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전격 침공한 팔레스타인 하마스 무장조직의 군사행동이 국제정세, 특히 서아시아 정세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오바마 행정부부터 이어진 미군 철수 움직임이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현실화되며 서아시아 일대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게 원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밖에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복잡한 역사, 지정학적이며 지경학적 요소, 종교적 문제, 각국 내정상황 등 다양한 이유가 자리할 테다.
 
전쟁과 관련해선 늘 인도주의적 문제 너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서아시아에서 수입하는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의 상황 말이다. 두 나라의 전쟁이 확전될 경우 직접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지대한 걸프만을 경유하여 대부분의 에너지를 수입하는 오늘의 현실은 이 문제의 표면을 넘어 이면까지 바라봐야 할 필요를 제기한다.
 
즉, 지난 십 수 년 간 팔레스타인 자치구인 가자지구와 동쪽 웨스트뱅크에서 자행된 폭력 같은 것이다. 특히 웨스트뱅크 일대에선 무장경찰을 앞세운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지인 셋틀먼트가 꾸준히 늘어 팔레스타인 거주구역이 갈수록 줄어왔다. 국제엠네스티 주도로 이뤄져 공식 채택된 골드스톤 보고서 등은 지난 십 수 년 동안 이스라엘군경이 팔레스타인 아이며 노인 등을 인간방패로 세워 가택수색을 하거나 일가족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등의 인권유린 실태를 확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구사회도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까지는 착수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는 하마스의 군사행동 뒤에는 저들이 처한 상황을 이미 전쟁국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테러가 아닌 전쟁이라는 팔레스타인의 입장과, 명백한 테러행위라는 이스라엘의 주장 사이 어딘가에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끔 하는 자리가 있을 테다.
 
플라워 킬링 문 포스터
플라워 킬링 문포스터롯데엔터테인먼트
 
멈추지 않는 여든의 거장 스코세이지
 
국제정세 이야기를 꺼내는 건 한 편의 영화 때문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갈수록 정력적인 영화를 뽑아내는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의 신작 <플라워 킬링 문>이 바로 그 작품이다.

영화는 100여 년 전 미국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보면 볼수록 팔레스타인과 북아일랜드, 체첸공화국이며, 티베트와 위구르 등 좀처럼 자유와 독립에의 열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약소민족의 상황이 겹쳐 보인다. 제 영화의 맥락이며 상징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스코세이지가 실제로 이를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당장 가려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표면 아래 깃든 이면이 러닝타임 내내 꿈틀대며 보는 이의 심안을 뜨게 하려 든다는 사실이다.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퇴역 군인이다. 1차대전에 취사병으로 종군한 그는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참전해 싸운 끝에 전역한다. 오랜 전쟁 뒤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그다. 오클라호마주에 자리잡은 외삼촌 윌리엄 헤일(로버트 드 니로 분)과 겨우 연락이 닿은 그는 맨주먹만 쥔 채 윌리엄에게 의탁하기에 이른다.
 
윌리엄은 일대에선 알아주는 명사다. 한때 캔자스와 오클라호마주 일대를 주름잡던 오세이지족은 여전히 지역의 토지와 부를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연방과 주법은 그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기본권마저 제한한다. 오세이지족이 누구인가. 지금의 캔자스주 일대에 비교적 큰 세력을 일궜던 강대한 부족이다. 이들은 미국 정부에 상당한 땅을 할양하면서까지 조약을 체결해 다른 많은 종족과 달리 토지소유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 오세이지족의 후손들은 백인들과 어우러져 살아간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오세이지족 후손들은 캔자스에서 밀려나 오클라호마주에 터를 잡고 있다.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플라워 킬링 문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부유한 인디언, 가난한 백인의 기묘한 공존
 
흥미로운 건 이들이 처한 기묘한 상황이다. 선조들이 남긴 광대한 토지는 오세이지족 주민들의 것이다. 그러나 법은 이들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사실상 금치산자로 대우한다. 자연주의자이며 야만적인 기질을 가진 그들이 백인들처럼 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주민이며 국민일 수는 있어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디언은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어도 제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 이들에겐 시민권을 가진 백인 후견인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재산을 현금화해 쓸 수 있을 뿐이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인디언을 구속하는 미국의 법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영화가 실감나게 연출한다.
 
그러나 오세이지족 구성원들은 어디까지나 부자다. 이 지역으로 흘러들어온 뜨내기 백인들과는 가진 것이 비할 수 없게 많다. 이곳에선 백인들이 육체노동을 하며, 농장주로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이들은 인디언이다. 백인들이 인디언의 집에서 하인노릇을 하거나, 어떻게든 인디언 여성의 눈에 들어 결혼을 하려 애쓰는 모습 또한 공공연하게 펼쳐진다. 가진자와 갖지 못한 자가 정치적으로는 반대되는 지위를 가졌으니, 이러한 상황이 자아내는 풍경은 태평양 건너 우리 눈에 이질적으로 비칠 뿐이다.
 
마을에서 어니스트는 흔한 백인이다. 삼촌이 성공한 유지라고는 하지만, 직계 자손인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경력이나 재산도 없어 기껏 취직한 곳이 택시회사다. 삼촌에게 받은 자동차를 몰고 돈 많은 이들을 태워 다니는 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는 게 고작이다. 목숨 걸고 전장을 뛰어다니던 그에게는 성에 안 차는 일이지만, 부보안관이자 명성 높은 삼촌이 두려워 조용히 따를 밖에 없다. 그러나 때때로는 사귄 친구들과 한밤중에 복면을 쓰고 나가서 오가는 이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장신구를 훔치는 일도 저지르곤 한다. 그리고는 도박판에서 하룻밤에 죄다 날리기 일쑤니,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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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죽음, 점점 다가오는 공포의 실체
 
삼촌이 어느 날 어니스트를 불러 말한다. 인디언 처녀 가운데서 몰리(릴리 글래드스턴 분)라는 여자가 있는데, 그녀를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마침 몇 번 그녀를 태운 적이 있는 어니스트는 그녀를 알고 지낸다고 답한다. 윌리엄은 몰리가 상속받은 토지가 상당히 많고, 그 가족 중에 사내가 없는 데다, 홀어머니며 다른 자매들이 병들어 있다는 점을 넌지시 알린다. 그리고는 그녀를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느냐고 제안한다.
 
어니스트가 마을에 익숙해질수록 보이는 풍경 또한 많아진다. 인디언의 부와 이를 노리는 사람들의 모습, 누군가는 돈을 노려 인디언에게 접근하고, 또 누군가는 자연스레 그네들과 사랑에 빠지는 풍경이다. 그 와중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 잇따르니, 고작 서른살을 전후하여 수많은 인디언 처녀총각들이 죽어나가는 것이다. 석연찮은 경우가 적잖지만 경찰수사는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워싱턴DC의 원주민 협의회로 보내지는 인디언 대표 또한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한다. 상대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은연 중에 퍼지고, 어니스트는 조금씩 그 공포의 실체에 접근해간다.
 
영화는 어니스트가 윌리엄의 큰 계획안에서 장기말처럼 움직이는 과정을 진득하게 잡아낸다. 인디언 여성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모습, 집안에서의 발언권을 얻어가는 과정, 이따금 윌리엄이 따로 맡기는 어둡고 흉한 일들을 처리하는 광경이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그 속에서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는 갈수록 고립되고 병들어 간다. 어머니와 자매들과 친구들이 죽어나가고 마침내 제 몸까지 건사하기 어렵게 된다. 이 모두가 오세이지족을 위협하는 백인의 술수란 걸 짐작하면서도 닿지 않는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지 못한다. 기껏 외부에서 초청한 탐정도, 인디언 협의회에서 가려 뽑아 워싱턴으로 보낸 대표도 살해당하는 가운데, 주변의 선량한 이들 누구도 이들을 지키겠다 응원하지 못한다.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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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폭력 뒤 자리한 검은 욕망
 
모든 폭력 뒤에 석유가 있다는 사실은 선명하다. 오세이지족의 광대한 토지에서 검은 원유가 뿜어져 나온 뒤부터 이들을 겨냥한 음모가 차근차근 실행되었으니 말이다. 법적으로는 제 땅에서 나온 부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연방정부는 너무 멀리 있었고 눈 앞의 적은 너무 강했다. 누구도 오세이지족을 도우려 들지 않았고, 영화 가운데 나오는 대사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폭력적인 야만인 취급을 하기도 했다. 법과 폭력 모두에 노출된 오세이지족은 그로부터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갇혀 갈수록 쪼그라들었고, 마침내 2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만이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최근 국제뉴스로 전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또 체첸이나 위구르, 중남미 몇몇 국가의 사정을 떠올리게 되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다. 누군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그저 두 나라의 문제이며 하마스의 테러행위로 발발한 것이라 이해하지만, 누군가는 이 전쟁이 최소한 지난 십 수 년 동안 이어졌으며 길게는 시오니즘이 현실화된 1차대전 이후부터 이어져온 것이라고 바라본다. 국제사회의 묵인 속에서 서방으로부터 인정받고 심지어 존중받는 강건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자행한 폭력은 심각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거주구역은 갈수록 좁아들고 있으며 살아남은 이들조차 제 생명과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져 왔다. 국가적 정체성은 인정받으면서도 정식 국가로서의 기본권은 보장받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면서도 혼자서는 처분할 수 없는 오세이지족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세이지족에게 워싱턴DC와 미 연방 대통령이 멀리 있듯이, 팔레스타인에게도 국제사회와 국제기구가 멀리 떨어져 있다.

둘 모두에서 에너지며 토지를 둘러싼 이권이 깊이 개입돼 있으며 인종과 종족, 종교와 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갈등도 자리한다. 힘의 심각한 불균형 가운데 약자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수행하는 강국이 비단 이스라엘 만이 아닌 현실을 돌아보면, 그리고 무엇보다 1945년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의 현실일 수 있었던 상황을 떠올리면, 이 영화와 오늘날 중동의 비극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고 느껴진다.
 
데이비드 그랜의 책 <플라워 문>을 바탕으로 마틴 스코세이지가 연출한 이 대작은 그저 100년 전 미국 땅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스크린을 넘어 현실을 겨냥하며, 강자의 위선과 폭력을 거침없이 까발린다. 에너지를 전적으로 수입하는 나라로, 중동의 정세에 민감할 밖에 없는 한국에서 국제뉴스를 바라보는 편협하고 치우친 시선이 개탄스러울 때가 많다. 장자와 이솝이 이야기했듯, 때로는 사실보다 우화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영화도 그렇다.
 
플라워 킬링 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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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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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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