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기자말2008년 9월 3일, 잠실에서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시즌 16차전이 벌어졌다. 두산은 정재훈, 한화는 유원상을 각각 선발로 내세우고 있었다. 4년째 팀의 주전 마무리로 뛰고 있던 정재훈으로서는 무려 1년 만의 선발등판이었고, 팀의 주전급으로 자리를 굳히지 못하고 있던 3년차 유원상 역시 1달여 만의 선발등판이었다.
두 선발투수 모두 익숙하지 않은 임무였지만, 동시에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정재훈은 6회까지 안타 2개와 사사구 2개를 내주긴 했지만 고비마다 삼진 7개를 솎아내며 무실점으로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하지만 유원상 역시 똑같이 6회까지 4안타와 사사구 1개를 내주면서도 6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버텼고, 두 팀의 감독은 나란히 투수교체를 단행하게 된다. 전문 선발투수가 아닌 두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끌어냈다고 봐야 했고, 더 이상 지체하는 것은 서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승부는 불펜싸움으로 넘겨지게 됐다.
두산에서는 이재우가 나왔고, 한화에서는 구대성이 나왔다. 하지만 두 투수가 버틴 7·8회에도 역시 나란히 무실점이 이어졌고, 9회에는 다시 두산이 임태훈을, 한화가 최영필을 거쳐 토마스를 투입했다. 하지만 역시 승부는 끝을 보지 못했고 결국 두산은 연장 13회에 네 번째 투수 김상현을 내보냈으며, 한화는 연장 12회부터 박정진, 마정길, 그리고 안영명을 올려보냈다. 그럼에도 두 팀의 투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팀과 순서를 가리지 않고 호투로 일관했고 타자들은 팀과 타순을 가리지 않고 빈공으로 일관하는 기묘한 평행선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연장 18회라는 신기원에 도달하는 순간, 묘하게도 전광판의 시계는 정확히 자정을 가리켰다. 그리고 TV 중계를 맡고 있던 캐스터는 지친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금 하이라이트가 아닙니다. 생방송입니다."18회 초 한화의 공격 역시 무득점으로 끝이 났고, 18회 말 두산의 공격 역시 무기력하게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며 경기는 19회를 향하고 있었다. 두산의 4번째 투수 김상현은 이미 6이닝을, 한화의 7번째 투수 안영명은 4.1이닝을 던지고 있었다. 선발투수 못지않은 많은 공을 던진 셈이었고, 이제 교체할 만한 투수들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줄줄이 아홉 번째 타석으로 불려 나오는 양 팀 타자들의 방망이질이 투수들의 공보다도 훨씬 둔해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날이 밝을 때까지 경기를 해도 끝나지 않겠다는 푸념을 넘어선 걱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 날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한화 선발 안영명이었다. 그제껏 4.1이닝을 완벽하게 막아오던 그는 연장 18회 말 2아웃을 잡아놓은 뒤부터 갑자기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넣지 못했다. 그래서 이성열, 이종욱, 고영민에게 거푸 볼 넷을 던져 만루 위기를 자초했고 결국 안영명은 타석에 들어선 김현수에게마저 네 개째 볼을 던짐으로써 밀어내기로 그 경기의 유일한 점수를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