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김기태 박경완과 조규제가 팔려간 1998년, 김기태와 김현욱은 쌍방울의 마지막 기둥이었고 그 기둥에 의지해 레이더스는 6위로 버텨내며 작은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남은 두 기둥마저 뽑혀나간 1999년에 역대 최다패 신기록의 멍에를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 김기태 박경완과 조규제가 팔려간 1998년, 김기태와 김현욱은 쌍방울의 마지막 기둥이었고 그 기둥에 의지해 레이더스는 6위로 버텨내며 작은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남은 두 기둥마저 뽑혀나간 1999년에 역대 최다패 신기록의 멍에를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 쌍방울 레이더스

1998년 12월 25일, 쌍방울 레이더스가 타격왕과 홈런왕을 지낸 4번 타자 김기태와 3관왕 경력의 투수 김현욱을 삼성 라이온즈에 내주고 양용모, 이계성이라는 무명의 선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물론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와 투수를 받게 된 삼성이 내놓은 실질적인 트레이드카드는 현금 20억 원이었다.

한 해 전 역시 쌍방울 레이더스가 15억 원을 받고 넘긴 박경완과 조규제는 그대로 1998년 현대 유니콘스의 첫 우승을 이끌며 프로야구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그러자 재계 라이벌 삼성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태의 조계현, 이강철, 그리고 임창용을 데려가며 맞불을 놓고 있었다.

그렇게 직전 두 해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해태와 3위권을 지켰던 쌍방울은 1997년 겨울에 터져 나온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추락하기 시작했고, 그 유산을 흡수한 두 마리의 공룡 현대와 삼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떠오르며 '라이거스 vs 레이콘스'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돈으로 남의 집 기둥뿌리를 빼가는' 것을 한국야구위원회 역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 벗고 나서서 흐름을 바꾸고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용오 KBO 총재는 박효수 쌍방울 레이더스 사장을 불러들여 각서 한 장을 쓰게 했고,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식상한 다짐을 곁들여 트레이드를 승인했다.

각서의 내용은 A급 선수에 대한 추가 트레이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듬해 전반기 중 무슨 일이 있어도 승률 3할을 넘긴다는 것이었다. 각서의 내용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쌍방울 문제를 이사회에서 논의한다'는 애매한 조항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하게 내려잡은 '3할 승률'이라는 목표치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하지 않고는 야구장에서 1승이라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껴보지 못한 책상물림의 한가한 망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1승도 거져 주어지지는 않는다

당시 쌍방울의 사령탑은 없는 전력에서 성적을 뽑아내기로 자타공인 역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온 '김성근 감독'이었다. 1989년과 1996년, 나란히 전년도 꼴찌 팀 태평양 돌핀스와 쌍방울 레이더스를 맡아 플레이오프까지 올려놓은 것은 그런 그의 실증적인 업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발굴하고 고쳐 쓸 선수의 공급마저 차단된 상황에서 단 한 장의 필승카드도 남기지 않고 털어낸 전력으로도 뭔가를 만들어낼 마력까지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99 시즌, 쌍방울은 철저한 동네북이었고 승수 쌓기의 제물이었다. 시즌 초반 현대에서 폐기처분된 김성근 감독의 옛 제자 박정현이 4연승을 달리는 오기를 보이며 분위기를 이끌기도 했지만, 곧 팀 승률은 정해진 듯 2할 대 중반으로 맞춰졌다. 그리고 양대리그제가 시행된 그 해, 개막 한 달여가 지난 시점부터 매직리그 선두 LG에 10게임차로 벌어지기 시작했고 리그 1위 팀이 서너 차례나 자리바꿈을 하는 사이에도 변함없이 승차는 꾸준히 늘어만 갔다.

그 사이 선수단과 프런트의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고, 2군이 해산되며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그리고 1군 선수단 역시 원정경기 숙소가 3급 호텔로 하향조정되었고 광주와 대전 원정경기는 매일 전주에서 출퇴근을 하며 치러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선수를 구해달라는 감독의 다급한 목소리는 늘 메아리없는 독백으로 끝이 났고, 오히려 구단 수뇌부에는 감독이 전력보강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승부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불신의 분위기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전반기를 마쳤을 때 쌍방울이 기록하고 있던 승률은 각서에 명시한 3할에 한참 못 미치는 .224(17승 5무 59패)였다. 물론 당장 KBO가 쌍방울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구단주와 사장의 발언권이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올스타전이 끝나던 7월 14일 밤 박효수 사장은 '구단주와 사장의 현실인식이 너무 안이하다'는 쓴소리를 서슴없이 해대던 김성근 감독을 만나 해임을 통보하게 된다. 명분은 슬프게도 '성적 부진의 책임'이었다. 박 사장은 그 자리에서 김 감독에게 '구단 고문직'을 제안했지만, 바로 전날까지도 '지금이라도 선수를 보내주면 반전이 가능하다'며 집념을 버리지 않았던 김성근 감독은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살을 베려던 칼에 뼈를 꺾이다

김성근 감독 1989년 태평양 돌풍의 주역 김성근 감독.1996년에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취임한 그는 이번에도 전년도 꼴찌팀을 곧바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연출했다. 하지만 주력선수를 모두 팔아치운 데다 신인선수의 공급줄까지 묶여버린 1999년만큼은 그 역시 뚫고 나갈 수 없었다.

▲ 김성근 감독 1989년 태평양 돌풍의 주역 김성근 감독.1996년에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취임한 그는 이번에도 전년도 꼴찌팀을 곧바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기적을 연출했다. 하지만 주력선수를 모두 팔아치운 데다 신인선수의 공급줄까지 묶여버린 1999년만큼은 그 역시 뚫고 나갈 수 없었다. ⓒ 쌍방울 레이더스

지휘봉을 물려받은 김준환 감독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주어진 조건의 한계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다. 김준환 감독이 남은 기간 동안 더한 것은 11승과 38패였고, 결국 최종승률은 김성근 감독이 물러나던 시점과 정확히 일치하는 .224로 맞춰졌다. 그리고 그것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이었다.

팀타율(.248)과 팀방어율(5.85), 팀홈런(86개) 모두 8위였고 1982년의 삼미 슈퍼스타즈(.188) 덕분에 역대 최저승률은 면했지만 늘어난 경기수 때문에 시즌 97패의 단일시즌 역대 최다패 기록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 해 전주와 군산의 홈경기를 찾은 관중수는 5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4만 9956명으로, 경기당 평균관중수는 757명이었다.

1997년 겨울 모기업 쌍방울 그룹이 부도처리된 뒤 레이더스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매각 뿐이었다. 하지만 결단해야 할 마지막 시기를 놓친 채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선수를 팔아치우는 방식은 끝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박경완, 조규제, 김기태, 김현욱 같은 주축선수들에 이어 입단도 하지 않은 신인선수(마일영)의 지명권까지 팔아 치우다보니 팀 자체의 가치를 남김없이 갉아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살을 베어내겠다고 든 칼이었지만 현장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한 어설픈 칼질은 끝내 뼛속까지 치명상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 공급이나 관중동원과 기업홍보효과라는 수요 면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전북 지역을 연고로 하고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새로이 프로야구 시장 진입을 검토하는 기업들의 경우 하나같이 서울 입성을 희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1999년 이후 시점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한다는 것은 팀 전력 구성에 있어서 별다른 이점이 없는 반면 인수 후 연고지 이전에 관한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고약한 물건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해체 구단

결국 2000년 1월 6일, 한국야구위원회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대한 법정퇴출을 선고했고, 이튿날 구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만다. 1990년에 창단해 이듬해 1군 무대에 오른 이후 9시즌동안 1140경기를 치러 455승 655패와 30무승부를 기록한 팀의 역사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한국프로야구는 6개 구단으로 출범해 8개로 발전해왔고, 이제 10개 구단체제를 현실적인 목표로 떠올리고 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그 중 여덟 번째로 창단하며 등장했지만, 불과 10년 만에 이번에는 '사상 최초의 해체구단'이라는 씁쓸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마침표를 찍고 사라지며 한국프로야구사의 격렬했던 부침의 한 시기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 10년은 전주와 군산의 야구팬들이 자신들의 팀을 향해 충분히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고, 하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깨끗이 지우고 말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역사와의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고 누구도 애써 챙겨가며 기념하려하지 않는 역사 속의 미아가 되어버린 오늘, 쌍방울 레이더스는 서둘러 삼켜져 소화되지 않은 채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있는 조그만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잘 곱씹어 넘긴 기억은 역사가 되고 추억이 된다. 하지만 그저 방치하고 덮어둔 기억은 어느 구석에선가 부대끼고 상처가 된다. 예컨대 SK 와이번스와 연관된 역사논쟁의 경우에서처럼 누군가를 조롱하는 소재로나 불려 나오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이름이, 들판을 구르며 이 발 저 발에 차이는 어느 객사자의 유골을 보는 듯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쌍방울 레이더스 마스코트 '방울이' 이름과 표정 모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귀여운 캐릭터임에 분명할 '방울이'. 하지만 오늘날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방울이의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 쌍방울 레이더스 마스코트 '방울이' 이름과 표정 모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귀여운 캐릭터임에 분명할 '방울이'. 하지만 오늘날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방울이의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 쌍방울 레이더스 팬클럽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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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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