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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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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학 .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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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답장을 받을 수 있을까?"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 각자 좋아하는 야구선수에게 편지를 보내서 한 달 안에 답장을 받으면 내기에서 이기는 것. 이긴 친구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기로 했다. 나는 김건우 선수에게, 친구들은 류중일, 문병권, 김윤영,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장○○ 선수에게 편지를 썼다.

김건우 선수는 선린상고, 나머지 선수들은 경북고 선수들이었다. 박노준 선수와 함께 선린상고(지금은 선린인터넷고)를 이끌었던 김건우 선수는 세계청소년 야구대회에서 노히트노런 기록을 세우고 우승을 이끈 주역이다. 그야말로 잘 던지고, 잘 치는 최고의 선수였다. 박노준 선수가 1981년 봉황기 결승에서 발목을 다친 이후 선린상고가 주춤하긴 했지만 나는 경북고보다 선린상고 야구부가 훨씬 좋았다.

종이학을 접으면, 사랑이 이뤄지리라 믿었던 그 시절

"오빠들 와 답장을 안 해주노? 손가락이 뿌러졌나?"

처음에는 내가 편지만 쓰면 무조건 답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편지를 받으면 답장을 하는 것이 예의니까 말이다. 편지에 답장을 꼭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했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그 '오빠'가 팬 레터를 하루에도 수십 통, 수백 통 받아도 내 편지는 읽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며칠을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아 작전을 바꿨다. 초등학생인 척하며 편지를 썼다. 왼손으로 삐뚤빼뚤하게 일부러 맞춤법도 틀려가며 나름대로 귀엽게 썼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어린 초등학생에게도 답장을 안 해주는 몰인정한 사람을 내가 계속 좋아해도 되는지 고민하기도 했다. 마지막 작전은 협박이었다. 오빠 때문에 시험을 망쳤다고 했는지, 답장을 안 해주면 죽어버린다고 했는지, 가출해서 오빠네 집으로 찾아간다고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 후 나는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다. 전영록 '오빠'가 부른 노래 '종이학' 때문이다. 노래가 인기를 끌자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여학생 잡지에 소개됐다. 나는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전해주며 울먹였다'는 노랫말을 천 번을 접지 않아서 노래 주인공들이 헤어졌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나는 꼭 종이학 천 마리를 반드시 접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 사랑은 몰라도 답장을 받고 싶은 소원은 이뤄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프고 슬프다는 노래, 애달픈 노래에서 나는 희망을 본 것이다. 종이학을 접고 또 접었다.

나 너를 알고 사랑을 알고
종이학 슬픈 꿈을 알게 되었네
어느 날 나의 손에 주었던

키 작은 종이학 한 마리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나에게 전해주며 울먹이던 너
 - 전영록 '종이학' 노랫말 중 일부

경북고 장○○ 선수에게 답장을 받은 친구가 내기에서 이겼다. 나는 장○○는 실력이 별로라고, 훈련과 연습으로 바쁜 김건우 오빠는 답장 따위 할 시간이 없다고, 종이학을 천 마리 접지 못해서 내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어쨌거나 그때부터 나는 사랑을 하게 되면 종이학을 접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 나와 같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천 마리 종이학을 수줍게 내밀며 사랑을 고백하면 그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먼저 마음이 변해버린 적도 있고 아예 종이학을 거절당한 적도 있다. 그래도 나는 믿고 싶다. 천 번을 접으면 사랑과 소원이 이뤄진다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공유될 예정입니다.



태그:#종이학, #전영록, #올드걸의 음악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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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주부입니다. 교육, 문화, 책이야기에 관심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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