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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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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르.

바지 앞주머니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보름 정도 제주도 출장을 갔던 남편이다. 김포공항이라며, 내일 캠핑갈 수 있냐고 물어온다. 너무 급작스럽고 기분도 꿀꿀해 힘들다 하니, 알았다며 전화를 끊는다.

동네 정형외과에서 아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병원에 도착해 진료시간을 기다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음 주와 다다음 주 토요일 일정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내일 못가면 다음 달인데, 병원 오는 길에 봤던 초록빛의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내일 가자고.

토요일 아침. 냉장고에 있던 야채, 김치, 냉동만두 등을 아이스박스에 쓸어 담고 캠핑장으로 출발했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햇살과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변진섭 1집 <홀로 된다는 것>(1988년)
 변진섭 1집 <홀로 된다는 것>(1988년)

자유로를 달리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변진섭의 <새들처럼>이 흘러나온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남편도 따라 부른다. "날아가는 새들 바라보며 나도 따라 날아가고 싶어 파란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 따라 가고 싶어"라는 부분에서는 목청껏 소리 내어 부른다. 노래가 끝나고, 남편과 나의 떼창(!)도 끝났다.

10대 후반에 처음 들었던 이 노래를 나는 20대 중반 노래방에서 많이 불렀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직장 초년생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 직장을 떠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떠나고 싶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나 떠나고 싶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가고 싶은 거다.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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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나처럼 떠나고 싶은 건가?'란 생각이 문득 든다. 노랫말처럼,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고.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노래가 끝나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25살 이후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고. 남편은 군대 제대 후 시간이 그렇다고. 우린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일요일 아침.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서둘러 철수했다. 감악산에 들러 놀다 가려다 하늘이 우중충해져서 그냥 집으로 출발했다. 집이 가까워지자 하늘이 맑아진다. 이런, 점심 먹을 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라디오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노래가 나온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남편과 나는 떼창을 한다. 기분이 묘하다. 남편과 내가 같은 노래를 듣고 부르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헐.


태그:#올드걸의 음악다방, #변진섭, #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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