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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늘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

올드걸의 음악다방
 올드걸의 음악다방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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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새 학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 그녀가 개선장군처럼 교실 미닫이문을 시원하게 '드르륵' 열고 들어왔다. 그때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 시절이었다. 왕성한 식욕을 참지 못한 아이들은 2, 3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다 까먹어버렸고 정작 점심시간엔 그 유명한 크림빵을 사먹으러 대부분 매점으로 몰려간 뒤라, 교실엔 몇몇 아이들만 엎드려 자고 있거나 수다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놀란 아이들은 큰 키에 넓고 구부정한 어깨, 넓적한 얼굴이 무척이나 하얘서 눈, 코, 입이 달렸는지 느껴지지 않는 그녀를 반사적으로 바라만 봤다. 몇 번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한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고 다섯 분단 다섯 번째 줄에 있는 내 앞에 멈추고선 내 짝의 자리에 있던 교과서와 노트를 내 쪽으로 쓱 밀어버리더니 나에게 물었다.

"5교시 수업은 뭐야."

1년 선배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 년을 넘게 학교를 쉬었고 유급해 뒤늦게 2학년 8반의 일원이 된 그녀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 안에 퍼졌다. 학년은 같아도 선배인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아이들은 대놓고 물어보진 못하고 그녀가 화장실을 가거나 교실을 잠깐 비울 때면 나에게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그 많은 소문 중, 고등학교 3학년 선배에게 들었다는 소문이 나름 신빙성이 있었는지, 그녀의 특이한 행동 때문이었는지 기정사실화되면서 난 한동안 그녀와 짝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대단한 아이가 됐다.

그러든지 말든지 화장실도 밥도 뭐든 우르르 몰려다니며 함께하는 게 지겨웠던 나는 그냥 그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 소문을 정리하자면 학교에 입학할 때 전교 1등으로 들어와 선생님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는 것, 여름방학 때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이 나갔고 학교에 오지도 못한 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는 정도였다.

이상해 보이는 그녀

아이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이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 반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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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이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느 날은 가만히 있다가도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로 혼자 떠들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수업시간이든 상관없이 온종일 엎드려 잠만 잤다.

난 주번도 그녀와 했는데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내 기억 속, 그녀의 모습 중 가장 밝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주번은 일주일 동안 2명이 맡아서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등교해 주전자에 물도 담아놓고, 컵도 씻어놓고, 화초에 물도 주고 화병에 물도 갈아주는 일들을 한다. 체육시간 준비물과 점심시간 한 번 더 주전자의 물을 담아 오는 일도 포함이다.

이 일을 하면서 그녀는 숭고한 소명처럼 평소와 다르게 잠도 자지 않았고, 이상한 말도 하지 않았다. 밥 먹듯 하던 지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지나쳤다. 하루에 많아야 두 번이면 되는 주전자에 물 담아오는 일을 쉬는 시간마다 새물로 담아왔다.

그리고 매일 강냉이를 사왔는데, 이것이 아이들에게 가장 큰 고문이었다. 그 강냉이를 들고 한 명도 빼놓지 않고 한주먹씩 나눠줬는데, 그게 참…. 받아먹는 사람 입장에선 대단한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줄 때마다 손에 꼭 침을 뱉고 주는 것이었다. 자기 기준에는 깨끗하게 하고 주는 행위인 것 같은데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학기말 고사도 끝나고 교실은 여름을 향해 뜨겁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혼자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고 난 그녀가 그러든지 말든지 내 할 일만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궁금하지 않아?"

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생각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가 나를 보고 또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그랬는지?"라고 말했다. 내가 뭘 궁금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넌 궁금하지 않지! 궁금했다면, 니 성격이라면 분명 물었을 거야."

그러니까, 뭘 궁금해야 하냐고.

"내가 하는 짓. 웃기지? 모두 날 미쳤다고 생각하잖아. 근데 내가 너희들처럼 행동해봐. 얼마나 당황하겠어."

중얼거리는 그녀... 자세히 들어보니

그리곤 또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이 노래라는 걸 알아차렸다. 처음으로 말이 돼 들렸다. 무척 익숙한 노래였다. "어, 너 <벤> 알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녀는 내 물음에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낮엔 늦더위가 여전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아도 아이들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었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녀의 자리는 그대로 내 옆이었지만, 그녀가 있었을 때와 똑같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시간은 지나고 내 옆엔 그녀가 아닌 다른 아이가 앉았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나마 있던 흔적, 그러니까, '강냉이를 볼 때'조차 사라졌다.

하지만 난 마흔이 넘은 지금도 <벤>을 들으면 여전히 그녀가 궁금해진다. 그녀와 함께 했던 4개월 남짓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벤>을 좋아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왜, 그녀가 자살을 했는지.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나는 그녀에게 친구로 다가가 물어볼 생각을 안 했는지....

나에게도 묻고 그녀에게도 물어본다. '그랬다면? 다른 친구들과 하듯 그녀와 수다도 떨고 울면서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 웃으면서 화해하고 고민도 나눴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말이다. '벤'을 들으면.

Ben, the two of us need look no more
벤, 우리 두 사람 더 이상 다른데 볼 필요 없어
We both found what we were looking for
우리가 찾던 걸 찾았으니까
With a friend to call my own
나의 사람이라 부를 친구가 있으니
I'll never be alone
나 절대 외롭지 않아
And you, my friend will see
그리고 내 친구인 너도 알거야
You've got a friend in me
정말로 친구를 얻었다는 걸

덧붙이는 글 | 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늘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말



태그:#마이클잭슨, #영화 'BEN', #학교, #7080,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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