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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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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골품사회이고 고려가 호족사회라면 조선은 사대부사회였다.

사대부(士大夫)란 사(士)와 대부(大夫), 문무 양반을 일반 평민과 비교하여 이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귀족계급이다. 사대부의 정점에 임금(왕)이 있었고, 조선조에서는 무반보다 문반의 지배구조로 짜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무능한 군주인데다, 재임기에 당파가 극렬하게 갈리고 이후 왕조는 물론 국가존망에 이르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역사의 가혹한 필주를 받아 마땅한 군주이다. 그때 사대부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이어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또 대북은 골북(骨北)ㆍ육북(肉北)ㆍ중북(中北)으로 갈리니, 소북은 청소북(淸小北)ㆍ탁소북(濁小北)으로 갈라졌다. 흔히 역사에서 사색당파를 남인ㆍ북인, 노론ㆍ소론을 말하지만 줄기와 가지는 훨씬 더 많았다.

이런 DNA가 전승된 것이었을까.

2015년 박근혜 정권 시절이다. 진박(진짜 친박), 가박(가짜 친박), 용박(박근혜를 이용만 하는 친박), 원박(원조 친박)ㆍ범박(범친박), 신박(신친박), 멀박(멀어진 친박), 짤박(잘린 친박) 등 끝모를 박타령이 울려 퍼졌다.(강준만,「부족국가 대한민국」)

허균은 1616년 5월 11일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0월 8일 파직되었다. 이이첨에게 내쫓긴 것이다. 5개월 만의 파직은 벼랑 끝으로 몰리는 위기의 순간이다. 이로써 그는 역적으로 몰려서 처형당하게 된다. 쉰 살인 1618년의 일이다. 이런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 「복귀부」란 시에서 자탄한다.

 애처롭다 험난한 내 생애
 마음 산란하여 창자 끊어지누나
 중니는 광야에서 고생하셨고
 육통은 미쳤으며
 자여는 신발을 끌었고
 장인은 물동이를 안았으니
 성인도 반드시 쓰여지지 않았으며
 현인도 반드시 쓰여지지 않았어라
 이는 옛날부터 그러하였거니
 오늘날 사람을 내 어찌 원망하랴
 운명에 맡기고 스스로 마음 늦추면 
 그런대로 내 이 몸 욕되지 않으리. (주석 1)

 
강릉 '초당마을숲' 허난설헌·허균 생가터
 강릉 "초당마을숲" 허난설헌·허균 생가터
ⓒ 신한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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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광해군 시대는 물론 조선왕조에서 두고두고 역적이라는 주홍글씨로 남았다. 금부에서 작성하는 죄인의 판결문인 결안(決案)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음에도 이이첨의 닦달로 임금이 주제하는 국문장에서 처형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허균과 관련 『선조실록』이나 『광해일기』등의 기록은 믿기 어렵다. 여기서는 김시양(金時讓)의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살피고자 한다. 

무오년(1618) 즈음에 오랑캐가 처음 소요를 부리자 천하의 군대가 일어나고, 우리 군사도 건주(建州) 가까이까지 진격하여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러자 허균이 변방에 급한 변고가 일어났다고 아뢰는 글을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으로 편지를 써서,

"어느 곳에 역모가 일어났으며, 어느 적이 어느 날 쳐들어온다"고 하여 성 안을 두려워 떨게 했다. 

또 밤마다 사람을 남산 위에 올라가게 하여, "서쪽 오랑캐가 압록강을 건너고, 유구 사람이 쳐들어와 성 안에 숨었다. 성 안의 사람들이 달아나 피해야만 연못 속의 물고기가 말라죽는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외치게 했다. 또 노래를 만들어,

 성이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이 달아나는 것보다 못하다.

성불여야 야불여월(城不如野 野不如越) 하였으며, 

또 등불을 걸고 이따금 "살아나고 싶은 자는 (성 밖으로) 나가서 피하라."라고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다. 장안의 민가들이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은 비었다. 심복 하인준으로 하여금 새벽에 지평 한명욱을 보고, "익명서가 숭례문에 붙었으니, 반드시 틈을 노리는 흉한 도적이 있다"고 말하게 하였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으므로, 글자를 보기 어려웠다. 명욱이 마음 속으로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대궐로 갔다. 숭례문에 이르렀더니 벽 위에 글이 씌어 있었는데, 과연 인준이 말한 것과 같았다. 

(한명욱이) 인준을 국문하기를 청하자, 인준이 그 무리 현응민(玄應旻)과 하나하나 자백하였다. 균과 그 무리가 모두 옥에 갇혔다. (이)이첨은 균을 국문하다가 자백이 자기에게까지 이어지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인준 등이 모두 자백했으니 더 물어볼 것이 없다면서, 곧 바로 저자에서(허균의) 목을 베었다. (주석 2)


그는 혁명의 준비 과정에서 이이첨 세력이 깔아논 덫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이다.  


주석
1> 이문규, 앞의 책, 382쪽.
2> 이가원, 앞의 책, 19~2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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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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