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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표지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표지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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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속물적 사대부들이 지배하는 조선왕조의 거친 황야를 걷는 일종의 탁발승이었다. 출사 → 파직 → 유배를 거듭하고 "남의 집 밑에다 집을 짓는 격(屋下架屋)"의 글쓰기를 질타하면서 주체적인 수많은 시문과 논설을 남겼다. 사대부들이 기피하고 한문으로 소통할 때 '언문'으로 소설도 지었다. 
 
왕조의 개국 이래 전대미문의 전란기와 교조화된 유교체제에서 그는 대단히 주체적이며 개방적인 반골이었다. 밖에선 폭우가 쏟아져도 가슴에는 사막의 갈증을 느꼈던 심성의 인물이다. 사는 동안에 회한이 너무 많았고 자책스러운 행위도 적지 않았다. 다소 무례하고 이기적이면서도 감성이 풍부하여 불우한 사람들을 보면 서러움을 함께 나눴다. 
 
시대를 초월하거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고,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관념의 깊이와 체험의 부피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해서 국외자가 되었고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줄넘기가 가능했다. 
  
강릉 '초당마을숲'과 경포호가 만나는 곳에 있는 다리 장식. 허균의 대표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손을 흔들고 있다.
 강릉 "초당마을숲"과 경포호가 만나는 곳에 있는 다리 장식. 허균의 대표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손을 흔들고 있다.
ⓒ 신한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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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토피아를 꿈꾼 혁명가이다. 소설 홍길동전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누구도 생각ㆍ상상할 수 없었던 통큰 이상사회(국가)를 꿈꾸었다. 그것이 비록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왕권탈취의 거사로 나타났다. 
 
허균보다 1세기 전 사람인 토마스 모어(1478~1535)는 대법관직에 있을 때 왕위계승법 선서를 거부하다가 단두대에 올랐다. 그는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유토피아』를 썼다. 허균이 꿈꾸었던 이상사회인 율도국과 닮은 데가 많다. 한 연구가는 유토피아의 통념을 11가지 조목으로 정리한다. 

첫째, 유토피아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계를 가리킨다.
둘째, 유토피아는 사회적 특권이 없으며 억압이 없는 세계이다.
셋째, 유토피아는 인간 존재의 평등이 인정되는 세계일 뿐 아니라 소유의 평등이 실현된 세계이다.
넷째, 유토피아는 지배와 복종이 없는 세계이다.
다섯째, 유토피아는 완전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실현된 세계이다.
여섯째, 유토피아는 모든 인간의 자유가 실현된 세계를 가리킨다.
일곱째, 유토피아는 물질적 궁핍이 없는 세계를 가리킨다.
여덟째, 유토피아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의 관계에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아홉째, 유토피아는 평화로운 세계를 가리킨다.
열 째, 유토피아는 도덕적 세계를 가리킨다.
열한째, 유토피아는 인간의 행복이 실현된 세계이다. (주석 3)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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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나 허균의 이상사회는 동양적 무릉도원과는 다르다. 도교에 관심이 많았던 허균의 소설에 무릉도원식 구도가 섞여 있긴 하지만, 도교계열의 도사들이 설계한 허방한, 그래서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유토피아와는 격과 결에서 크게 다른 것이다. 

『홍길동전』이 단순히 신분타파와 의적의 활동 등으로만 일반에 이해되고 있지만, 해외진출 → 평등한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대로망이었음을 살필 때, 허균은 혁명을 통한 조선사회의 개변을 시도하였던 이상주의자임을 알게 된다.  

허균은 나라의 정치가 혼란하고, 백성이 도탄에 허덕이는 것을 분개하여, 이 세상을 뒤집어보겠다는, 첨예한 혁신 사상을 충분히 가진, 풍운 남아이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이상으로 여기는, 가상의 인물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삼아, 홍길동전을 지어, 자기 의도의 일면을 보였나니, 길동이 도둑의 굴에 들어가 두령이 되어, 팔도의 탐관오리를 모두 토벌하고, 그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학정에 시달리는 곤궁한 서민들을 구제하며, 한편으로 서자라는 버림받는 계급의 처지를 벗어나, 남들과 같이 존귀한 지위를 얻는 사실을 부연하여, 일반 눌려 있는 민중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분풀이를 통쾌히 하고, 자기 회포의 만장기염을 토하였다. (주석 4)

 
쪼잔한 유생들과 좀팽이 같은 사대부들에게 허균의 존재는 제거의 대상이고, 상종하기 어려운 이단아였다. 이 같은 인식은 당파를 초월해서 나타났다. 중국에서 이탁오를 사대부들이 저주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허균을 죽임으로 몰아가는 국문장의 상황을 살펴보자. 

광해군이 인정문에 나와 앉아서 친히 심문하였다. 그러나 남대문에다 격서를 써 붙였다는 것만 가지고 사형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은 이이첨에게 

"벌써 사형시키는 것은 너무 빠르다. 물을 만한 일들을 더 물은 뒤에 죽이는 것이 어떤가?"

물었다. 그러나 이이첨은

"도당들이 모두 승복했는데, 더 물어볼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고집했다. 허균은 변명할 기회도 없었다. 남들처럼 결안도 없었다. 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자, 이이첨이 허균을 끌어내라고 시켰다. 그제서야 허균도 자기가 속은 것을 알고,

"할 말이 있다."

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국청의 위 아래에 늘어섰던 심문관들은 모두 못들은 척했다. 결국 허균ㆍ하인준ㆍ현응민ㆍ우경방ㆍ김윤황은 역적의 이름을 쓰고 서시(西市)에서 즉시 처형당했다. (주석 5)


주석
3> 김균진, 「성서의 시각에서 본 유토피아사상」, 『외국문학』, 제13호, 1987.
4> 장지영 주해, 『홍길동전ㆍ심청전』, 79쪽, 정음사, 1963.
5> 이가원, 앞의 책, 25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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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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