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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집 옆으로 "탈탈탈탈" 경운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뒷산 쪽에서 기계음 소리가 들려오면 노루 새끼마냥 바싹 긴장하게 됩니다. 재작년 이맘때부터 뒷산을 까뭉개려는 산 주인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거든요.

산 주인과 '맞장' 뜬 끝에 겨우 '택지개발의 조짐'을 중지시켜 놓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이유로 다시 산을 왕창 까뭉갤지 모르니까요.

누굴까? 마당 밖으로 나와 보니 아랫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운기에 묘목을 잔뜩 싣고 있었습니다. 얼핏 보니 엔진 톱도 있어 보였습니다.

"저 냥반들이 또 뭔 일을 벌이려구…."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경운기 쪽으로 다가 갔습니다. 경운기를 세워놓은 곳은 산속 작은 늪지에서부터 열댓 포기의 산미나리를 옮겨 놓은 자리였습니다. 산미나리가 한창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경운기 바퀴에 짓밟혀 있었습니다. 경운기를 빼라고 할까 하다가 너무 야박한 것 같아 차마 그러질 못했습니다.

"마침 잘됐구먼, 일루 와 봐유!"

나보다 두세 살쯤 나이가 더 많은 아랫동네 '뭐시기'네 아버지가 손짓을 했습니다. 뭔가 횡재가 될 만한 큰 인심을 쓰겠다는 그런 말투였습니다.

"일루 와서 이거 갖다 심어유, 몇 그루 줄게."
"뭔디 그류?"
"밤 나무유."
"됐슈, 근디 엔진톱은 뭐하려구?"

"한 이삼십 그루 줄테니께, 갖다 심으라구."
"'아 됐다께, 그거 심을 땅두 읎슈!"
"심어 놓고선 두고두고 따먹으면 좋찮유."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밤나무 묘목을 그냥 줄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엄습해 오거나 어떤 일에 흥분을 하게 되면 내 입에서는 평소보다 과장된 사투리가 툭툭 튀어 나옵니다.

"밤나무만 심으려구 하는 게 아니구먼, 엔진 톱 까정 들구…."
"밤나무 좀 베고 거기다가 묘목 줌 심으려구유…."
"밤나무 산에다가 뭔 밤나무를 심겠다구 그류, 저번에도 산을 죄다 까뭉개 놓고 산주인이 마지못해 밤나무 몇 그루 대충 꽂아놨잖유, 저기 봐유, 그거 발써 다 말라 죽었잖유, 그래 놓고선 또 뭔 놈의 밤나무를 심겠다구 그런다는 겨…."

"아, 이번에는 진짜로 심을 거유, 내가 관리 하기루 했슈!"
"산 주인 이 양반 징말 웃기네, 이번엔 동네 사람 덜 앞장 세워 또 뭔 꿍꿍이를 벌이려구, 아무튼 나무 심는 거야 좋지만, 좌우당간에 멀쩡한 나무 왕창 베 놓구 거기다가 어린 묘목 심겠다는 생각은 마슈! 사진 찍어서 확 고발해 버릴테니께."

내가 반 협박조로 나오자 세 사람은 '너 혼자 떠들어라 우릴랑 밤나무를 심겠다'는 무표정으로 삽과 묘목을 들고 산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그저 감시의 눈초리로 그들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엔진 톱으로 말짱한 나무들을 댕강댕강 잘라놓고 나서 투기꾼들을 몰고 다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작년에도 그랬으니까요.

점심 무렵에 다시 산 쪽으로 올라가 보니 산비탈 밭을 죄 파헤치고 있었습니다. 내가 평소 '농사 사부님'으로 모시고 있는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네 밭이었습니다.

"너무 하는 거 아뉴 이거? 아랫집 할아버지가 어떻게 일군 밭인디."
"산 임자가 주인인데 왜 그류?"

"징말 너무 하는구먼,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동네 사람덜이 앞장서서 죽어라 일궈놓은 할아버지 밭이나 까뭉개구."
"그래두 할 수 없지, 산주인 맘인디…."
"내 참 어처구니가 없구먼, 어처구니가 없어, 당신이 관리한다며!"

일제 강점기 때 왜놈 지주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힘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던 마름들도 이랬을까 싶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손바닥만큼씩 산비탈 밭을 개간해온 유씨 할아버지. 그 밭들이 단 하루만에 밤나무 묘목으로 뒤덮여 가고 있었습니다. 울화통이 터졌지만 나는 더 이상 참견할 수 없었습니다. 유씨 할아버지네 땅도 내 땅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산골 마을 사람들의 사정이 그러하듯 우리 동네 사람들 중에 제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우리 집처럼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땅 위에 집만 얹혀 살고 있는 형편입니다. 땅 있는 사람들이야 산을 개발하여 택지를 조성하면 땅 값 오르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지만 문제는 땅 없는 사람들 중에 개발을 반기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뒷산을 관리하겠다며 할아버지의 밭에 밤나무를 심고 있는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의 땅 위에 얹혀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산이 개발되면 동시에 집값이 올라 자신들도 그 이익을 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들 생각대로 분명 집값도 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땅값이 오르면 집값뿐만 아니라 토지세며 소작농으로 지어 먹던 농토 값도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오를 것입니다. 땅 없는 사람들은 땅 주인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땅세를 내야 하고 끝내는 소작으로 지어 먹던 농토마저 군소리 없이 땅 주인에게 내 놓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땅주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금싸라기가 된 땅을 소작료 몇 푼 받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까? 뒷산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유씨 할아버지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할머니가 근심스런 얼굴로 반깁니다.

"할아버진 안 계시네, 비닐하우스에 가셨네벼유?"
"아녀유, 벵원에 갔슈."
"언제유?"
"어제 밤에 갔는디, 자꾸만 헛구역질을 혀서, 큰 일 났슈!"

유씨 할아버지는 올 들어 두 번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평생 머슴처럼 땅만 일궈왔던 칠십대 초반인 유씨 할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기운이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근심 가득한 할머니에게 '뭐시기'네 아버지가 밭을 죄 망가뜨린다고 차마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산비탈 밭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협박'이 먹혔는지 '뭐시기'네 아버지 일행은 엔진 톱을 내려놓고 유씨 할아버지네 밭에다가 밤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내 밭은 그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비탈 밭을 일구다가 문득 할아버지의 밭을 올려다봅니다. 마치 산주인이 '여기는 내 땅이여' 확인 도장 찍어 놓듯 밤나무가 꽂혀 있었습니다.

농사일이 시작될 무렵이면 산비탈 밭에서 유씨 할아버지와 만나는 일이 많아집니다. 초보 농사꾼인 나는 유씨 할아버지에게 들깨며 감자며 마늘이며 생강 등등을 어떤 자리에다가 언제 어떻게 심나, 밭두둑은 얼마나 넓게 하는지, 요것 저것 캐물어 댑니다. 귀찮을 정도로 캐묻지만 유씨 할아버지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갑고 기분 좋은 낯빛으로 상세하게 알려 줍니다.

▲ 바위돌을 쪼개 밭 가장자리에 돌성 처럼 쌓아 올린 유씨 할아버지의 산비탈 밭.
ⓒ 송성영
나는 문득 밭에서 풀을 뽑다 말고 여기 몇 평씩 저기 몇 평씩 산비탈 곳곳에 널려 있는 유씨 할아버지의 밭들 중,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삼사 년 전쯤이었습니다. 유씨 할아버지는 그 산비탈 밭에서 커다란 바위 하나를 캐냈습니다. 할아버지는 망치와 정을 들고 아침부터 바위를 쪼아대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뭐 하셔유, 힘드시게!"
"밭 만들어서 들깨 줌 심으려구…."

유씨 할아버지는 점심을 드시고 제 자리로 돌아와 그 일을 계속 했습니다. 저녁 무렵에도 계속해서 바위를 쪼갰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 무렵, 며칠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바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밭 가장자리에는 돌무더기들이 보기 좋게 놓여있었습니다.

그 해 할아버지는 바위를 캐낸 그 밭에다가 들깨를 심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그 밭에 아무것도 심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돌아오신 유씨 할아버지는 산비밭을 둘러 보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밤나무 묘목이 심어진 밭 가장자리에서 그저 넋을 놓고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생태 전문잡지 <자연과 생태> 5,6월호에 보낸 원고를 수정해서 올린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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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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