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한국시리즈에서 19타수 9안타 8타점의 호쾌한 타격으로 해태의 우승을 이끌어 MVP에 뽑힌 김봉연이 시상품으로 받은 자동차에 올라 관객들의 박수에 답례를 하고 있다.
ⓒ 한국야구위원회 간 <한국프로야구화보>에서

관련사진보기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는 야구대표팀 사령탑에 현대 김재박 감독이 선임됐다. 이번 대회 야구 종목에 출전 예정인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중국, 필리핀, 태국 등이다.

출전 예상국 가운데 1950~70년대 한국과 야구 교류가 많았던 필리핀이 눈에 들어온다. 올드팬들에게 필리핀 야구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필리핀 야구와 스포츠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필리핀, 한자 나라 이름은 비율빈(比律賓).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일반적 의미의 수준이 높았던 나라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첫 대회를 연 아시아경기대회는 1954년 제2회 대회를 필리핀 마닐라에서 펼쳤다.

한국이 1970년 대회를 유치했다가 준비부족으로 반납하고 1986년에 이르러서야 서울에서 대회를 연 사실에 견줘 보면 1950년대 필리핀의 스포츠 수준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한국은 뉴델리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다음 대회인 마닐라 대회에는 전쟁의 상처를 씻고 참가해 복싱, 역도, 육상, 레슬링, 축구 등에서 금 8, 은 6, 동메달 5개를 땄다.

축구 종목에는 개최국 필리핀을 비롯해 한국, 자유중국(대만), 월남(베트남), 버마(미얀마), 파키스탄,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아프가니스탄, 홍콩이 출전했다. 한국은 결승에서 자유중국에 2-5로 져 준우승했다. 한국은 이 대회 예선에서 아프가니스탄을 8-2로 이겼다. 이 대회 멤버가 거의 그대로 그해 스위스 월드컵 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필리핀은 금 14, 은 14, 동메달 17개로 일본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1958년 도쿄 대회에서도 필리핀은 주최국 일본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다. 1962년 자카르타 대회에서 필리핀은 종합 7위(금7 은6 동25)로 밀렸지만 한국(금4 은9 동10)보다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1966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금 12 은 18 동21)은 필리핀(금 2 은 12 동 25)을 앞질렀고 그 뒤 격차가 점점 벌어져 1982년 뉴델리대회 이후에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 졌다.

야구 종목에서 한국과 필리핀은 주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기량을 겨뤘다. 1954년 12월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한국은 일본에 0-6, 필리핀에 4-5로 지고 자유중국을 4-2로 물리쳐 필리핀(3승), 일본(2승1패)에 이어 3위를 했다.

훗날 '아시아의 철인'으로 칭송받는 고 박현식이 투수로 출전했고, 1940년대 후반 경남중-광주서중의 명승부를 이끈 장태영이 중견수로, 김양중이 투수로 대표팀에 뽑혔다.

제2회 대회도 마닐라에서 열렸다. 한국은 1차리그에서 필리핀에 4-6으로 지고 2차리그에서 7-5로 이겼으나 일본에 2패하는 등 2승4패로 다시 3위에 그쳤다.

대회 기간 열린 아시아야구연맹 총회 결정에 따라 앞으로 대회는 2년마다 열기로 하고 제3회 대회를 1957년 서울에서 갖기로 했다.

당시 서울운동장은 7천 명 정도를 수용하는 작은 경기장이었다. 외야에는 스탠드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 나라 사정은 야구장 확장 공사를 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1957년 서울 대회를 건너뛰고 1959년 도쿄에서 제3회 대회가 열렸다. 올드팬이면 누구나 기억하는 일본전 1-20 참패를 기록한 대회다.

한국은 일본전 참패에도 1, 2차리그에서 필리핀과 자유중국에 모두 승리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준우승했다. 이후 한국은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5회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한다.

한국과 필리핀의 야구수준은 1960년을 전후로 역전됐다. 그러나 필리핀 야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1969년 타이베이에서 열린 제8회 대회 1차리그에서 한국은 필리핀에 1-3으로 졌다. 너클볼 투수 가밀라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결과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전반적으로 고전하며 1승1무4패로 꼴찌가 됐다. 실업야구가 활기를 띠고 재일동포 선수들의 영입으로 경기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던 시기라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1971년 호주가 처음 참가한 제9회 서울 대회에서 한국은 김호중, 김응룡, 박영길, 강병철 등이 활약해 1963년 대회 이후 8년 만에 정상을 되찾았다.

한국은 필리핀을 2-0, 5-1로 물리쳐 전 대회의 충격적인 패배를 설욕했다.

한국선수단이 묵었던 호텔에 불이 나 황규봉이 다치는 등 어수선한 가운데 벌어진 1973년 제10회 마닐라대회에서도 한국은 필리핀을 5-4, 7-2로 꺾고 4승3무1패로 준우승했다.

 1975년 서울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단. 이 대회에서 김봉연은 35타수 13안타 .371, 12타점을 올렸다. <FONT COLOR=A77A>[깜짝 질문] 이 사진에서 김봉연은 어디 있을까요?
ⓒ 한국야구위원회 간 <한국프로야구화보>

관련사진보기


한국과 필리핀의 야구수준이 완전히 벌어진 '사건'이 1975년 제11회 서울 대회에서 벌어졌다. 한국은 1차리그에서 필리핀을 13-0, 자유중국을 5-1, 호주를 8-1, 일본을 4-0으로 꺾으며 신바람을 냈다.

김호중, 이선희의 쾌투에 윤동균, 김봉연, 박해종 등의 방망이가 불을 뿜고 있었다.

2차리그 첫 경기가 벌어진 6월27일 필리핀은 자국 야구역사상 잊을 수 없는 참담한 패배를 한다.

0-28.

한국은 1회말 이해창의 선두타자 홈런 등 홈런 6개를 포함해 25안타를 폭죽처럼 터뜨렸다.

각종 기록이 쏟아진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7회초 김봉연이 한 이닝에 두개의 홈런을 날린 것이었다. 이 홈런은 1950년대 이후 한국과 접전을 이어온 필리핀에 더 이상 한국에 대한 도전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린 'KO 펀치'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7승1무의 좋은 성적으로 3번째 정상에 올랐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