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에 0-5 대패를 당했던 8년전 프랑스 월드컵과 비교할 때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웃는 일이 더 많아졌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1998년 6월 21일 저는 새벽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습니다. 8년 전 그날의 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그 시간 마르세이유에서는 프랑스 월드컵 E조 조별리그 2차전 한국-네덜란드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동아일보사 건너편 동화면세점 건물 앞 빈터에 요즘 길거리 응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초창기 '붉은 악마'의 응원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응원단 모두의 마음에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일주일 전에 벌어진 멕시코전에서 1-3으로 졌지만 월드컵 출전 사상 처음으로 선제골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들 월드컵 '1승'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선제골'의 의미도 대단했습니다.

꺼이꺼이 울던 젊은이, 4년 뒤에는 웃었겠지요

새벽잠을 미루고 광화문으로 달려온 열혈 팬들의 기대와 달리 한국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리자마자 '오렌지 군단'의 막강한 화력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전반 38분 필립 코퀴의 선제골, 43분 오베르마스의 두번째 골, 그리고 후반 들어 베르캄프의 추가골을 포함해 3골이 폭죽처럼 터졌습니다. 그 때마다 콧수염을 기른 거스 히딩크의 세리머니가 전광판 화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멕시코전 하석주의 프리킥 선제골에서 비롯된 실낱같은 '1승'의 염원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0-5'. 1954년 미군 비행기를 빌어 타고 50여시간을 날아가 치른 스위스 월드컵의 헝가리전 0-9, 터키전 0-7 패배 이후 한국이 월드컵에서 치른 경기 가운데 가장 큰 스코어차였습니다.

경기가 벌어지는 내내 초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골이라도 넣었으면…"하는 희망은 끝내 물거품이 됐습니다.

근처에 있는 사무실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어디선가 꺼이꺼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보도 턱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 채 목놓아 울고 있었습니다. 처연한 울음 소리였습니다.

"4년뒤에 보자"고 어깨라도 토닥거려 주고 싶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4년 뒤 정말 가슴 후련하게 웃었을 겁니다.

축제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번 독일 대회에서 '원정 월드컵' 첫 승을 따기까지 한국 축구는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축구가 이 땅에 들어온 뒤 120여년 동안 한국 축구는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질책을 받기도 했지만 많은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1956년·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우승과 1970년 메르데카배, 킹스컵, 아시안게임 등 3관왕 소식에 축구팬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때는 아시아 지역 대회에서 우승해도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4강,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8강 소식은 답답한 국내 정세 속에 던져진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였습니다.

1985년 가을 멕시코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일본을 2-1, 1-0으로 물리치고 32년만의 월드컵 진출을 확정하자 축구팬들은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이후 4년마다 월드컵이라는 세계인의 축제에 한국 팬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승패에 관계없이 축제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즐거움입니까.

24일 새벽 한국 축구는 월드컵 2회 연속 1라운드 통과라는 새로운 역사에 도전합니다.

8년 전 그 날이 떠오릅니다. 한국 축구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발전한 한국 축구이기에 이제는 다시 젊은이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2006-06-23 16:27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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