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가는데 사건수사를 담당한 형사들이 어쩐지 무능해 보인다. 현장보존도 허술하고, 단서추적도 느슨하며, 수사방식이 다소 엉뚱한 듯하다. 예를 들어 사진을 기록해두었어야 할 때 화가를 데려가 그림을 그리게 한다든가, 증거의 경중을 분류하는 기준이 비논리적으로 오락가락해서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살인사건 현장에는 기자들이 들끓고, 기자들마다 창의적 추측이 가미된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심지어 '아님 말고' 식의 음모론을 막 던지는 기자들도 있다. 그 와중에 사건수사팀은 사건현장과 기자들을 전연 통제하지 못하고, 목격자들과 적합하게 소통하지도 못하며, 뚜렷한 성과조차 내지 못한다. 대중의 기대는 높은데 사건해결은 지지부진한 상황,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쉬울까?
그럴 땐 유가족과 일반인들이 나서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제대로 된 수사를 촉구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 쉽다. 때로 적극적인 유가족과 일반인들이 의기투합할 경우 그들은 일종의 시민단체를 결성해 자율적으로 사건수사에 뛰어들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소피: 웨스트코크 살인 미스터리>는, 살인사건에 대한 의심스럽고 미심쩍은 공식 수사활동에 대한 유가족과 일반인들이 포함된 민간 차원의 자율적 수사활동 전개라는, 적극적 대응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일랜드의 웨스트코크에서 프랑스 여성 소피가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은, 프랑스인(피해자&유가족)과 아일랜드인(수사팀&영국검찰)이 얽혀들어 무려 23년간 질질 끌다가 아쉬운 대로 일단락된 강력사건이다. 일단락되기만 했지, 사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범인이 확정되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상영시간 1시간 안팎의 3편이 시리즈로 묶여있는 작품으로, 넷플릭스에 최근 공개되었다(2021년작).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아일랜드 웨스트코크의 별장에 와서 홀로 머물던 소피라는 프랑스 여성이 1996년 12월 24일 별장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건신고를 접수한 그 지역 '평화수호대'는 신속히 수사를 개시했다. '코크의 콜롬보'로 불리우는 더멋 드와이어 평화수호대 대장이 사건수사를 총괄했다. 근 100여 년간 살인이란 일어난 적이 없는 웨스트코크에서, '코크의 콜롬보'는 평화수호대의 인력을 총동원해, 최선을 다해 수사를 진행해나갔다.
그런데 강력사건 수사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때로 무리한 수사가 전개되기도 했다. 수사관들이 소피의 생전 사진을 보여주며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어서 탐문수사에 임하는 지역주민들이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당황하기도 했다. 수사 초기, 무려 54명의 용의자를 지목한 것도 평화수호대의 수사가 '아마추어'스럽다는 냄새를 풍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드와이어 대장은 용의자를 과감히 줄여나갔고, 마침내 한 명으로 좁히는 데 성공했다. 그 한 명은, 그 동네사람 이언 베일리(Eoin Bailey)라는 프리랜서 기자였다.
소피가 시신으로 발견된 작은 동네 '스컬'은 오래 전부터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른바 '뜨내기'들이 수시로 들락거렸지만 지역주민들이 개방적 생각을 갖고 있어, 지역주민들과 외지인들은 물론 외지인들끼리도 서로서로 잘 어울리며 지내는 곳이었다. 그리고 스컬은 바람이 몹시 부는 해안과 유령출몰 전설을 '쓰리캐슬헤드' 같은 산악지대도 동시에 포함하고 있어, 암흑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오묘하고 다크한 매력을 풍겼다.
그 매력에 반한 괴짜 예술가들은 1회 방문에 그치지 않고 그 지역에 아예 눌러앉기도 했다. 소피는 그런 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다. 병적인 면, 죽음, 괴물 등 어두운 면에 좀 더 끌리는 다크 낭만주의자로 다큐멘터리 제작자였던 소피는 그곳에 집을 샀고, 프랑스 파리의 화려함에 질릴 때면 아일랜드 스컬로 날아가곤 했다. 그녀의 다음 작품 주제는 다크 낭만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눈물, 타액, 정액 등 인간의 '체액'이었단다.
소피의 사망과 목격자의 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