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연구속은 느렸지만 기술과 제구력, 그리고 배짱이 돋보이는 투수였다. 통산 100승-100패 이상을 기록한 단 9명의 투수 중 한 명이다.
두산 베어스
그 무렵 OB 베어스 안에서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김진욱이었다면, 반대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는 장호연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당대의 해설가들이 미처 따라가며 이름붙일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기괴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만루에서 4번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에조차도 '이깟 공놀이쯤'이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으로, 혹은 열 살짜리 아들에게 배팅볼이라도 던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싱글거리고 이죽거릴 수 있는 별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데뷔 첫 해 시즌 17패로 넙치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도 이듬해 곧장 1.58의 평균자책점으로 타이틀을 따내는 배짱을 과시하기도 했고, 86년과 87년에는 13승과 15승을 올리며 팀의 주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1988년 시즌을 앞두고 늘 그랬듯 길고 지루한 연봉싸움을 벌였던 그는 동계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컨디션은 아직 실전에 투입되기에 너무 이른 상태였다. 급작스레 뚫려버린 구멍에 그가 배치된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었다. 개막전이라고 하지만, 그 한 경기 때문에 시즌 첫 주의 선발로테이션을 한꺼번에 허물 수 없었던 김성근 감독으로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노는 말'이 장호연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별명은 '짱꼴라'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말의 뜻과는 무관하게 장호연과 잘 어울리는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단단한 것 같으면서도 말랑말랑하고,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꼬여있는. 그래서 '짱돌'과 '꽈배기'와 '짜증' 같은 단어들을 한꺼번에 연상하게 만드는 스타일. 그래서 타자들은 늘 그의 변화구에 헛방망이질을 하면서도 '다음에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너는 끝장이다'라는 자신감으로 불끈거렸다. 그러다가 정말 한 번 제대로 잡고 두들겨댄 날도 왠지 깔끔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 날의 투구가 그랬다. 장호연은 거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공이 없을 만큼 빙빙 돌며 '낚시질'을 했고, 롯데 타자들은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앞 다투어 초구와 2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속 120키로미터 후반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공들이 딱 배팅볼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또 그 날 갑자기 등판하느라 제대로 컨디션을 끌어 올리지 못한 상태라는 약점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롯데 타자들이 '다음 타석에는 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며 세 번씩 타석과 더그아웃을 오가고 나자 거짓말처럼 경기는 끝이 나버렸고, 전광판의 아랫 줄에는 무수한 '0'이 새겨져있었다. 볼 넷이 두 개, 몸에 맞는 공이 한 개 있었지만 병살타 역시 두 개 기록되며 타석 수는 28이었고, 투구수도 딱 99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점수 0, 안타 0. 삼진도 실책도 0. 노히트노런, 그것도 '개막전, 무삼진 노히트노런'이라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기록이었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 기록한 무사사구 노히트노런그로부터 불과 보름이 지난 뒤, 이번에도 그 못지 않게 충격적인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4월 17일, 광주 무등야구장. 3연속 우승에 도전하고 있던 자타공인의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와 그 해 역시 탈꼴찌 싸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던 창단 3년차의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더구나 해태의 선발은 '천하의' 선동열이었고, 그 선동열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이 선동열의 맞상대로서 미련 없이 버린 카드는 2년차 신인투수 이동석이었다.
전 시즌이었던 1987년, 선동열은 14승과 0.89라는 신화적인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에이스로서의 입지를 더 단단히 하고 있었다. 반면 군산상고 출신임에도 고향팀 해태의 1차 지명자 3명 안에 들지 못해 타향팀으로 밀려났던 이동석이 거둔 성적은 고작 1승과 6.37의 평균자책점이었다. 그 두 투수의 맞대결에서 관전포인트라면, 이동석이 과연 몇 회까지 버티면서 다른 투수들의 어깨를 아껴주느냐 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선동열은 역시 선동열이었다. 그날 그는 이강돈, 유승안, 강정길에 이정훈과 장종훈이 가세하며 힘이 붙기 시작하던 빙그레 타선을 상대로 무려 11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며 9이닝을 완투했고, 점수는 단 한 점만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시즌 2패째를 당하며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맞상대했던 이동석이 덜컥, 또 한 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동석이 기록한 노히트노런은 장호연의 것보다도 더 놀라운 면이 있었다. 바로 '무4사구 노히트노런', 즉 단 한 개의 안타도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 개의 볼 넷이나 몸에 맞는 공도 내주지 않는 기적적인 투구였기 때문이다.
물론 안타와 4사구 없이도 '퍼펙트게임'이 되지 못한 이유는 두 개의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7회 말과 8회 말, 유격수 장종훈이 1루수 강정길에게 던진 공이 뒤로 빠지면서 두 번 출루를 허용했던 것인데, 그 중 한 번은 장종훈, 한 번은 강정길의 실책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동석이 장종훈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날 두 팀을 통틀어 유일했던 점수를 만들어냄으로써 대기록의 전제인 승리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7회 초 우월 3루타를 치고 출루한 뒤 선동열의 견제구가 뒤로 빠진 틈을 타 홈을 밟은 장종훈이었기 때문이다.
그 해 이동석은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7승을 올리며 한 몫을 했다. 그리고 빙그레는 기존의 한희민, 이상군에 더해 이동석, 김홍명, 김대중, 김용남 등의 투수들이 전반기에만 54경기중 20경기를 완투한 대활약을 토대로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며 창단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경사를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해 이후 이동석은 다시는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성적이나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7년만에 프로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그 뒤 그는 화순고를 거쳐 모교인 군산상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얼마 전 군산상고 훈련장에서 만난 이동석 감독에게 그날 노히트노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살짝 얼굴까지 붉혀가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그날 상대선발로 내가 나온다고 그러니까 해태 타자들이 전날 술을 엄청 먹어서 그런 거예요. 정말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