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1993년의 프로야구는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을 홀로 상대하며 181개의 공을 던진 라이온즈 박충식의 투혼과, 하지만 투혼 따위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듯 소리 없이 진군해 일곱 번째 왕좌에 오른 타이거즈의 능숙한 세리머니 속에서 저물었다.

선동렬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 정상 고지에서 내려서야 했던 타이거즈는, 이번에는 마무리투수로 재기해 0.73이라는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을 세운 선동열의 힘으로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선동열이 완벽하게 뒷문을 틀어막자 온기가 선발진으로까지 번지며 다승왕 조계현을 필두로 송유석,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까지 무려 다섯 명의 10승 대 투수가 배출됐다(선동열 자신까지 모두 여섯 명이 10승 이상을 기록). 그런 압도적인 마운드 아래서는 팀 타율이 2할 5푼에 턱걸이한 물 방망이도 큰 장애요인이 될 수 없었다.

우승은 늘 그런 압도적인 위력의 에이스가 가져다주는 선물이었다. 원년 OB 베어스는 우승의 제단에 박철순의 허리를 내놓았고, 1984년 자이언츠는 최동원의 어깨를 바쳤다. 그리고 1986년부터 해태의 왕조시대가 시작된 이래 잠시나마 그 숨 막히는 행군을 멈춰 세운 것은 한 편으로는 선동열의 부상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에 내려진 김태원과 김용수, 염종석과 박동희 같은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1993년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축복과 동떨어진 침침한 변두리에서 묵묵히 전진했던 이들에 의해 또 다른 길이 개척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듬해 패권의 주인공이 되는 LG 트윈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대항마가 되는 태평양 돌핀스에 관한 이야기다.

창단 첫 해의 우승, 그 뒤의 깊은 추락

이광환 감독 이광환 감독은 공과와 장단점이 뚜렷한 지도자이며, 통산성적도 그리 내세울만 한 편은 못 된다. 하지만 1993년에 그가 제시한 투수진 운용의 원칙은 한국야구가 한 단계 올라선 중요한 계기로 평가할 만 하다.

▲ 이광환 감독 이광환 감독은 공과와 장단점이 뚜렷한 지도자이며, 통산성적도 그리 내세울만 한 편은 못 된다. 하지만 1993년에 그가 제시한 투수진 운용의 원칙은 한국야구가 한 단계 올라선 중요한 계기로 평가할 만 하다. ⓒ LG 트윈스


1990년에 창단하자마자 해태의 5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며 왕좌에 올랐던 트윈스는 1991년에 6위, 1992년에는 7위로 전락하며 바닥을 기어야 했다. 선수단의 명단은 1990년 우승 당시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김재박과 이광은이 1991년을 끝으로 각각 팀을 떠나면서 내야진을 새로 꾸려야 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20대 선수들과 20대 못지않은 내구력의 김용수, 정삼흠으로 꾸려진 투수진만큼은 우승 당시보다 못할 것이 없었다.

타격이 약하고 수비조직력이 흐트러진 팀이 정상을 넘볼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단단한 투수진을 보유한 팀이 하위권으로 처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기 드문 일이다. LG트윈스가 첫 우승 이후 두 해 동안 오히려 뒷걸음질을 쳐야 했던 것은 오로지 투수들이 돌아가며 전력에서 이탈하는 부상과 부진의 릴레이 때문이었다. 물론 그 부상과 부진이란 상당부분 '내년을 생각하지 않는' 임기응변식 마운드 운용 때문이었고, 그래서 적절하고 효율적인 몸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에 18승을 올리며 정규시즌을 이끌었던 김태원은 이듬해 8승으로 주저앉았고, 12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2승을 거둬 MVP가 되었던 김용수도 1992년에는 세이브 없이 5승으로 내려앉았다. 각자 훈련에 전념할 수 없었던 개인사정이나 크고 작은 부상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우승 당시 23세이브를 기록했던 정삼흠이 1991년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내리 세 번이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고 갑작스레 선발진으로 복귀하면서 투수들의 보직이 한꺼번에 뒤엉켰던 것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92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이광환 감독이 '돌발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마운드'를 구상하게 했던 배경이었다.

실패와 난관이 새로운 길을 찾게 하다

이광환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것은 서울 라이벌 OB 베어스에서였다. 프로원년 김영덕 감독 아래서 코치로 프로지도자의 이력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시즌을 마친 뒤 베어스의 2대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 끝에 자진해서 물러난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곳에서 미국 유학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자율야구'의 기치를 올렸다.

자율야구란 선수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들을 스스로 채워가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평생 엄하고 험한 규율 속에서만 자라고 살아온 선수들이 자율을 이해하고 움직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반면 구단이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전임자를 밀어내고 이광환 감독에게 기회를 준 이유는 당장 우승을 해 보이라는 단순한 요구 때문이었다.

1989년에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밀려난 채 5위로 시즌을 마감한 데 이어 1990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반복했고, 결국 10연패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11연패에 빠져벼렸던 6월 19일에 그는 전격 해임당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그래서 잠시 공백을 거친 뒤, 이번에는 백인천 감독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가 털고 일어선 빈자리를 물려받은 LG 트윈스에서 그는 무작정 각자에게 과정을 맡기는 대신 각자의 책임감을 끌어낼 수 있는 '구조'를 고민했고, 그 결과 1993년에 세상에 내놓은 것이 이른바 그가 명명한 '스타시스템'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발 로테이션의 고정, 그리고 계투와 마무리로 이어지는 확실한 투수 분업 시스템이었다.

1993년, 트윈스는 선발진에 김태원과 정삼흠을 축으로 삼아 김기범과 차명석, 그리고 신인 이상훈을 배치했고 8년차 베테랑 우완 차동철과 신인 좌완 강봉수를 필승계투요원으로, 그리고 김용수를 마무리로 고정했다. 그리고 선발투수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기든 지든 6이닝 이상을 맡겼고, 화급한 사정이 없는 한 마무리 투수에게 2이닝 이상은 맡기지 않았다.

물론 결과가 아주 신통한 것은 아니었다. 선발진의 에이스 정삼흠이 15승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김기범과 이상훈이 9승, 김태원이 8승씩을 기록하며 각자 꼭 같은 숫자의 패전까지 떠안았고, 5선발 차명석은 그나마 7승 9패로 패전이 조금 더 많은 평범한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한 번 이기면 한 번 지는 흐름이 시즌 내내 계속되었고, 연타를 당하고 있는 선발투수를 좀처럼 교체하지 않는 모습은 '승리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비난을 불러오기도 했다.

1994년, 두 번째 우승에 성공한 트윈스 1990년의 우승이 몇 가지 행운과 노련한 지도력이 결합된 결과였자면, 1994년은 잘 구축된 시스템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 1994년, 두 번째 우승에 성공한 트윈스 1990년의 우승이 몇 가지 행운과 노련한 지도력이 결합된 결과였자면, 1994년은 잘 구축된 시스템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 LG 트윈스


하지만 차동철과 강봉수를 거쳐 김용수로 이어지는 불펜만큼은 시즌 내내 강인한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한 번 잡은 리드는 빼앗기지 않는 강팀의 면모를 서서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마무리로 뛰던 80년대 후반 내내 매시즌 100이닝 이상(1986년 178이닝) 던져댔던 김용수는 그 해 만큼은 50경기에서 단 75.2이닝만을 던지는 여유를 누리며 5승과 26세이브로 뒷문을 단속해 주었고, 그 덕에 정규리그 4위를 거쳐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는 절반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돌풍 뒤의 미풍, 돌핀스의 과제

트윈스 못지 않게 반복되는 무리와 몸살의 악순환을 고민하던 팀은 태평양 돌핀스였다. 돌핀스는 1989년,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만년꼴찌에서 3위까지 수직상승하는 경악스러운 돌풍을 연출했던 팀이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떠난 그 이듬해부터 곧장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그리고 정민태와 김홍집까지 돌아가며 부상으로 이탈, 단 한 번도 최상의 투수전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유령선 같은 팀이 되어 있었다.

그 악몽의 절정은 1993년이었다. 그 해 돌핀스는 공교롭게도 모든 주전급 투수들이 동시에 드러눕는 불운 속에 신생팀 쌍방울에게마저 멀찍이 따돌려진 채 선두 해태와 무려 43.5경기차로 벌어진 압도적인 꼴찌로 내팽개쳐지는 대참사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정동진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조건 재활 우선의 사인을 보냈고, 감독 생명 연장을 위한 무리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래서 많게는 7승, 적게는 3승을 올렸을 뿐인 투수 여섯 명이 고르게 한 경기 씩을 책임지고 가는 여유로운 운영을 이어갔고, 정명원과 박정현과 정민태 등이 통째로 한 해를 쉬며 느긋하게 몸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정명원 1993년을 통째로 쉬며 충분한 재활의 시간을 가진 정명원은 1994년에 40세이브로 통산 최다세이브 신기록을 세웠고, 올스타전에서는 3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내며 투수로서는 두 번째로 미스터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 정명원 1993년을 통째로 쉬며 충분한 재활의 시간을 가진 정명원은 1994년에 40세이브로 통산 최다세이브 신기록을 세웠고, 올스타전에서는 3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내며 투수로서는 두 번째로 미스터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 한국야구위원회


천운의 동행 없이도 우승할 수 있는 길을 찾다

물론 그렇게 '급할수록 돌아가는' 운영의 대가는 한 해 뒤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4년, 트윈스는 1년간의 시험가동 끝에 완성된 신무기를 내놓을 수 있었고, 돌핀스는 1년간의 넉넉한 시간 동안 충분히 고치고 날을 세운 칼을 쥐고 나설 수 있었다.

1994년, 트윈스의 마운드는 18(이상훈)-16(김태원)-15승(정삼흠)의 막강 선발 삼각편대로 시작해 김기범, 차명석, 차동철, 전일수로 두터워진 계투진을 거쳐 35세이브포인트의 마무리 김용수로 이어지는 완벽한 포메이션을 완성했다.

타선에서 터져나온 유지현-김재현-서용빈 트리오의 폭발력과 만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 중 한 장면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에 견주기에 너무나 초라하지만, 태평양 돌핀스 역시 팀타율 최하위라는 악재 속에서도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와 40세이브 신기록의 마무리투수를 배출하며 인천 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에 조금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드디어 '천운의 동행'이 없이도 우승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명의 에이스를 기다리고 그에게 매달리고 애원하고 강요하는 시대에 조금씩 막을 내리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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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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