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스터와 가르시아 감독으로서 첫 번째, 하지만 실질적인 사령탑으로서는 세번째 이방인이었던 로이스터는 3년간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성공을 거두었다.

▲ 로이스터와 가르시아 감독으로서 첫 번째, 하지만 실질적인 사령탑으로서는 세번째 이방인이었던 로이스터는 3년간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성공을 거두었다. ⓒ 롯데 자이언츠


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기자말>

2007년 11월 26일, 롯데 자이언츠는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감독을 지낸 경력이 있는 제리 로이스터를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고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한국프로야구사 최초로 외국인 감독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는 재일교포 이충남(일본명 야마모토 타다오)을 '조감독'으로 영입해 실질적으로 팀 운영의 전권을 맡긴 적이 있었다. 이충남은 1967년 난카이 호크스(오늘날의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2차 2번으로 지명된 유망주였지만 선수로서는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6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고, 난카이의 수비코치를 거쳐 당시에는 한큐의 작전분석코치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경기의 흐름을 읽고 상대팀의 움직임을 분석해내는 능력이 뛰어나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능력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굳이 '조감독'이라는, 프로야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괴상한 직책을 맡긴 것은 당시 경북야구의 대부로까지 불리던 서영무 감독을 밀어내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었는데, 그런 눈치를 모를 리 없는 서영무 감독이 시즌 중 자진사퇴하면서 이충남의 직책은 '감독대행'으로 바뀌기도 했다.

 1983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 언론의 취재에 응하고 있는 서영무 감독(가운데)과 이충남 조감독(오른쪽)

1983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 언론의 취재에 응하고 있는 서영무 감독(가운데)과 이충남 조감독(오른쪽) ⓒ 삼성 라이온즈


하지만 이충남의 기용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는 박철순의 투혼에 말리며 실패했지만 후기리그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고 객관적 전력 면에서는 자타공인 최강이었던 탄탄한 전력에다가 1983년에는 김시진과 장효조라는 국내 최고의 투수와 타자를 영입하고도 삼성은 그 해 4위(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공동 2위)로 추락했던 것이다.

물론 한 팀의 성적을 오로지 감독의 능력만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다. 전년도 15승 트로이카인 이선희, 황규봉, 권영호가 동시에 부진에 빠진 것도 컸고 3할을 치던 톱타자 장태수가 2할대 초반으로 추락하면서 공격력이 전반적으로 무뎌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전혀 한국말을 할 수 없었기에 선수들과의 융합은커녕 선수들에 대한 파악도 어려웠다는 점, 그리고 역시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거칠었던 반일본 정서가 만들어내는 불필요한 오해와 충돌이 그를 고립시킨 것이 문제였다. 이충남은 능력 있는 야구인이었지만, 감독에게 더 중요한 자질은 리더십이었고 리더십은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그의 한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방인 사령탑의 실험, 이충남과 도위창

 일본과 한국의 '롯데'팀을 오가며 수석코치로서 경력을 쌓았던 도이 쇼스케(도위창)

일본과 한국의 '롯데'팀을 오가며 수석코치로서 경력을 쌓았던 도이 쇼스케(도위창) ⓒ 롯데 자이언츠 팬북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외국인과 같은 경우긴 했지만, 어쨌든 이충남은 한국야구위원회가 한국인으로 간주하기로 한 '재일교포' 였다. 하지만 순수한 외국인이 한국 프로야구팀의 사령탑에 오른 경우도 있었는데, 1990년 8월 28일자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대행으로 임명돼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24경기를 지휘한 도이 쇼스케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재일교포도 아닌 순수한 일본인이었지만, 오히려 한국야구와의 인연은 이충남보다 훨씬 길었다. 1976년 실업팀 롯데의 창단 코치로 부임해 4년간 활동했고,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에도 1984년에 롯데 자이언츠의 수석코치로 기용돼 다시 4년간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몇 년 간격으로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롯데' 팀을 오가며 양 팀에서 수석코치를 번갈아 지낸 독특한 경력의 인물이었고, '도위창'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만들어 쓸만큼 한국과의 인연을 각별히 생각했다.

1986년 그는 이미 한 번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대행에 오른 적도 있었다. 팀에 창단 후 첫 우승을 선물한 강병철 감독이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구단 전무와 충돌하며 팀을 떠나자 구단에서는 후임으로 도이의 정식감독 기용을 검토했다. 하지만 KBO가 '일본인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데 대한 국민감정'을 이유로 만류해 결국 무산되었는데, 당시 그가 감독대행으로 보임되었던 기간이 12월 1일부터 1월 9일까지의 비시즌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휘봉을 잡고 지휘한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없었다.

어쨌든 1990년 가을, 도이 감독대행은 24경기를 지휘했지만 성적은 8승 1무 15패로 참담했다. 물론 그의 지휘 아래 기록한 승률 .354는 그 해 시즌 승률 .388과 별다를 것 없었고, 이미 최하위권으로 성적이 굳어진 채 치른 경기에서 선수들의 의욕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패'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면도 있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가 그 시즌이 끝난 뒤 '첫 우승의 주역' 강병철 감독과 화해하고 영입에 성공하자 도이의 지도력을 실험할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세 번째 실험, 로이스터

2008년의 로이스터는 이충남으로부터 25년, 도이 쇼스케로부터 18년이 지난 한국야구계의 개방성과 흡수력, 포용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사례가 되었다. 그는 조감독이나, 감독대행이 아닌 정식감독이었고, 절친한 사이인 투수코치 아로요와 야구선수 출신이자 마이너리그에서 함께 코치로 일했던 한국인 보좌역 커티스 정(한국명 정윤현)으로 구성되는 나름의 '사단'을 대동했다. 게다가 그를 보좌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도 그가 직접 선발했고 그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미국야구 출신의 선수 2명도 따라 붙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가 출발한 환경은 이충남이나 도이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로이스터 감독은 취임 일성으로 '기본기'와 '변화'를 선언했고, 선수들에게는 '자율과 책임', 그리고 '두려움 없는 플레이'를 요구했다. 그 모든 요구사항의 공통분모는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관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로이스터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물론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롯데에서의 첫 해에 부산 팬들이 8년간 소망해 온 '가을야구'의 꿈을 실현시켰고 그 성적을 3년간 유지했다. 2008년 롯데는 2007년에 비해 1할 이상 높은 승률을 만들어냈다. 타율은 1푼 이상 높아졌고, 평균자책점은 0.5가량 떨어졌으며, 도루는 무려 두 배(67개 → 133개)로 늘어났다. 실책이 10개 늘었지만, '미루다 흘리는' 악성 실책들을 '나서다 빠뜨리는' 양성 실책으로 대체해가며 경기의 질을 높였다.

로이스터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기존에 인맥이나 파벌에서 비롯되던 선수와 지도자 기용 등의 '관점에 따라 늘 달라지던 불공정의 문제'들이 일시에 수면 아래로 사라져버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장점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그가 최소한 하루하루 그 날 거두어야 하는 1승에 집착하는 스타일의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점과 연관된다. 그가 재계약에 어느 정도 신경쓰고 스트레스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는 눈 앞의 한 경기를 잡기 위해 장기적인 손실을 감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충분치 않은 자원 속에서 무수한 경기를 극적인 블로운 세이브로 망쳐가는 가운데서도 끝내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던 마운드 운용은 그 대표적인 영역이었다. 2008년 6월, '한국에서는 4강에 들어가지 못하면 감독이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해임되곤 하는 관행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 사실 한국에서 감독의 임기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성적이 좋지 않으면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지휘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쨌든 나로서는 지금은 그런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내 모든 관심사는 이 팀이 조금 더 강해지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이 팀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많은 팬들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게끔 하는 일뿐이다."

물론 '메이저리그 감독 출신의 거물'이라는 존재감은 그가 선수단 내에서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유용하게 기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을 결정적으로 확립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성적이었다. 그가 감독으로 취임한 첫 해에 롯데 자이언츠는 21세기 들어 최초로 '가을야구'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더 크게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이김으로써, 선수와 팬들의 신뢰를 얻다

김성근 전 SK 와이번스 감독에게 강한 훈련의 효과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런 답을 얻은 적이 있었다.

"강하게 훈련을 시키는 것은 감독으로서도 승부야. 훈련을 잘 소화하는 것이 선수들의 몫이라면, 그렇게 훈련한 선수들을 데리고 성적을 내는 게 감독의 몫이야. 그렇게 강하게 훈련을 했는데도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선수들은 지도자를 불신하게 돼 있어. 그래서 지도자는 선수들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성적을 내야 해."

로이스터는 선수들에게 강한 훈련을 요구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율의 영역을 극대화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강한 훈련을 강요하든, 자율적 훈련을 요구하든, 그것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순간 그 지도자는 선수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그리고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선수들의 핑계거리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지도자들은 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하는 것이다. 로이스터 역시 감독으로 재임했던 3년간 내내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며 선수들과 팬들의 신뢰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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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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