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손민한 그의 선수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그의 전성기에 팀은 바닥을 기었고, 팀의 전성기에는 그가 쉬어가곤 했다.

▲ 손민한 그의 선수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그의 전성기에 팀은 바닥을 기었고, 팀의 전성기에는 그가 쉬어가곤 했다. ⓒ 롯데 자이언츠


1990년대 중반까지 사람들이 '롯데' 하면 떠올리는 단어가 최소한 '꼴찌'는 아니었다. 그 무렵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이언츠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오히려 '독종'이라거나 '끈질김' 같은 것들이었고, 그것은 그 팀의 선수나 팬들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이었다. 최동원의 4승 역투로 판도를 뒤집은 1984년의 한국시리즈, 연봉 1500만 원짜리 19세 소년 염종석이 이끈 1992년의 우승, 발목이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2년 만에 치르는 복귀전에서 3안타를 때려낸 박정태와 그가 이끈 그해의 준우승 등이 물론 그런 이미지의 실제 근거들이었다.

염종석과 주형광이라는 소년 에이스들이 마운드의 중심을 잡고 있었고, 마해영과 박정태라는 재능 있는 젊은 강타자들이 타선의 주축을 이루어 1995년 준우승을 이룬 이후에도 해마다 5억짜리 거물 신인들을 수혈한 그 롯데 자이언츠가 전설 같은 꼴찌 팀의 역사를 써나간 것은 그래서 '정말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1990년대 후반,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롯데를 전설적인 약체팀으로 전락시킨 것은 불운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선수협을 분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역대 최고 타자 중 하나인 마해영의 트레이드도 불사했던 구단 고위층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목표의식과 동기와 자극을 부여하며 발전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관리라도 해가며 현상유지를 시키지도 못했던 지도자들의 무능에서 심화된 것이며, 당장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고 해서 해마다 시즌 중반에 감독을 갈아치운 구단의 경박함에서 골병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도 아쉬울 것 없다'는 식으로 손을 놓아버린 부도덕한 감독이 있었고, 그와 함께 승리에 대한 집념마저 놓아버린 한심한 선수들이 있었다.

염종석, 주형광, 손민한, 문동환 같은 명투수들을 동시대에 보유하고도 늘 '선수의 부족', 더구나 '투수력의 빈곤'에 허덕였던 사정을 그저 불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꼴데(꼴찌+롯데)'의 원흉으로 각인된 한 감독의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여러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손민한, '먹튀'로 프로인생을 시작하다

손민한은 얼른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파란만장한 선수인생을 보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고교와 대학을 거치며 늘 최고로 꼽혔고, 늘 동년배들 중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던 선수였지만 프로에서의 삶은 진흙탕에서 시작한 것부터가 그랬다.

1997년, 그는 국가대표 에이스의 명성을 업고 롯데 자이언츠에 1차로 지명되며 5억 원의 계약금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롯데 팬들의 가슴 속에는 두 해 전 우승 직전에서 좌절했던 분기가 남아 있었고, 그해 나란히 입단한 두 거물투수 손민한과 문동환이 곧 복수극의 선봉장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손민한과 문동환은 입단계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 약속이라도 한 듯 '팔이 아파 공을 던질 수가 없다'며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기존 주력투수들인 윤학길과 박동희가 나란히 허리부상으로 전열을 이탈한 데다가, 한 해 전에 입단한 또 한 명의 '5억 팔' 차명주는 아픈 데도 없이 초점 없이 흩어지는 공을 던져댔다. 그 결과는 팀 창단 후 첫 '2년 연속 꼴찌'의 자맥질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약팀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3년간, 손민한이 팀에 기여한 것은 거의 없었다. 2년차인 1998년에는 단 한 개의 공도 1군 무대에서 던지지 못했고, 겨울부터 '재기'에 관한 요란한 소문을 몰고 나타난 1999년에도 10경기에 나와 19.1이닝을 던진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첫 3년간 그가 남긴 성적은 1승 3패 2세이브가 전부. 야구만 잘하면 밥도 택시도 공짜라는 부산, 그러나 '손민한'이라는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없는 부산 땅에서 그의 삶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2005년 정규리그 MVP 그는 한국프로야구사에서 하위권 팀이 배출한 유일한 정규리그 MVP다.

▲ 2005년 정규리그 MVP 그는 한국프로야구사에서 하위권 팀이 배출한 유일한 정규리그 MVP다. ⓒ 롯데 자이언츠


꼴찌 팀의 에이스로 재기하다

더 이상 끈질기게 그의 재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을 2000년에 그는 드디어 12승을 기록하며 다시 나타났고, 그 이듬해에는 내친 김에 15승으로 전진하며 다승왕 타이틀까지 따내는 기적을 연출한다.

하지만 1997년에 '문동환-손민한 쇼크'로 꼴찌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비상해 1999년 준우승의 기적까지 연출했던 팀은 손민한이 다승왕으로 화려하게 돌아온 2002년 다시 꼴찌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손민한은 롯데라는 팀과의 바이오리듬이 엇갈리는 선수거나, 아니면 약체팀의 기둥이라는 슬픈 운명을 점지받은 선수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로 그 2001년부터 롯데 자이언츠라는 팀의 본격적인 비극은 시작됐다. 한 명의 감독이 심장마비로 떠나고, 다시 두 명의 감독이 시즌 중에 잘려나간 뒤에도 다시 한 시즌을 더 치르도록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초유의 '4년 연속 꼴찌'의 신화가 작성된 것이다.

그 사이 1999년에 0.372라는 기록적인 타율로 타격왕에 오르며 35홈런까지 곁들였던 리그 최강의 타자 마해영이 '선수협 주동자'라는 이유로 2001년 시즌을 앞두고 쫓겨났고, 그와 짝을 이루던 거포형 포수 임수혁이 쓰러졌으며, 다시 2001년 시즌이 끝난 뒤에는 역대 최고 출루율(0.503)의 신화를 쓴 최고의 외국인타자 호세가 짐을 챙겨 태평양을 건넜다.

그리고 그 시기에 손민한 역시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2년간 7승밖에 올리지 못하는 슬럼프를 겪었고, 2004년에는 선수인생에서 처음으로 마무리투수로 전향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다시 선발투수로 돌아온 그는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한다. 선발투수로서 26번, 구원투수로서 2번 등판하며 모두 168.1이닝을 던졌고, 2.46의 평균자책점과 18승 7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특히 선발투수로서 평균 6.1이닝을 소화했고, 특히 6회 이전에 강판한 것이 5번에 불과했을 만큼 평균치로서 드러낼 수 없는 '안정성'이라는 면에서도 최고의 능력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성적은 다승과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전체 1위에 해당했고, 그렇게 2관왕에 등극했다.

그해 롯데 자이언츠는 5위를 차지한다. 비록 3위 팀 SK와는 14.5경기, 4위 팀 한화와는 6경기차가 벌어진 '확실한' 하위권이긴 했지만, 그것은 연속꼴찌기록이 5년으로 이어지는 것을 저지한 의미 있는 반등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럴 만한 전력을 갖추고 이룬 당연한 성적은 아니었다. 그해 롯데의 팀 타율과 팀 출루율은 단연 꼴찌인 0.253이었고, 팀 홈런과 팀 도루도 7위에 해당하는 처참한 상태였다. 상위권에 해당하는 팀기록은 실책(3위), 삼진(2위), 도루실패(2위) 등 나쁜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나은 것은 4.30으로 전체 4위에 해당한 팀 평균자책점을 비롯한 투수 쪽 기록이었고, 그것에 의지해 롯데는 꼴찌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손민한의 위력이 작용했다. 그는 그 자신을 제외하면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가운데 고군분투했고, 혼자 힘으로 팀 평균자책점을 무려 0.32나 끌어내리는 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만약 손민한이 없었다면 한국프로야구의 팀 최다연속꼴찌 기록은 '5' 이상으로 늘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롯데 암흑기 투타의 기둥, 손민한과 이대호 2005년에는 손민한이 투수부문 2관왕에 올랐고, 2006년에는 이대호가 타자부문 3관왕에 올랐다. 문제는 한동안 그 둘이 롯데 투타 전력의 거의 전부라는 점이었다.

▲ 롯데 암흑기 투타의 기둥, 손민한과 이대호 2005년에는 손민한이 투수부문 2관왕에 올랐고, 2006년에는 이대호가 타자부문 3관왕에 올랐다. 문제는 한동안 그 둘이 롯데 투타 전력의 거의 전부라는 점이었다. ⓒ 롯데 자이언츠


전무후무한 하위권 팀 출신의 MVP

그런 손민한에게 정규리그 MVP의 영광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29년의 프로야구사에서 유일하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팀의 선수에게 주어진 정규리그 MVP였다.

물론 그것은 그해 홈런과 타점 부문의 서튼(현대, 7위), 타격과 최다안타 부문의 이병규(LG, 6위)처럼 하위권 팀 선수들이 주요 개인타이틀을 석권하는 기현상 때문이긴 했다. 물론 승률(오승환), 탈삼진(리오스, 배영수), 세이브(정재훈) 등 상위권 팀 출신의 타이틀홀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승과 평균자책점 부문을 석권한 손민한을 놓고 다른 투수가 MVP를 넘볼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선수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임에도 불구하고 MVP는 팀의 성적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팀의 위세가 선수에 미치는 '후광효과'이기도 하지만, 팀의 성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개인기록은 의미가 떨어진다는 팀 스포츠의 철학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 해 손민한의 활약은 여느 해의 우승팀 에이스 못지않은 가치를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그는 승패가 결정된 경기에서도 선발투수로서 늘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하며 팀 마운드 전체를 안정시킨 투수였고, 때로는 타이틀 경쟁 와중에서도 불펜 등판 요구를 거부하지 않은 헌신적인 투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승을 이어가는 것보다도 연패를 끊는 것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도 결정적으로 그가 끊은 연속꼴찌의 기록이 롯데는 물론이고 한국프로야구를 구원한 의미 있는 활약이었기 때문이다.

손민한의 역투에 눈물 흘린 기억, 진정한 롯데 팬의 훈장

하지만 손민한의 선수인생이 파란만장하다고 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로부터 다시 4년간 두 자리 수 승리를 기록했고, 1980년대의 최동원과 1990년대의 염종석-주형광에 이어 2000년대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팀의 역사에 기록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2008년, 무려 9년 만에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던 그해에 12승을 거둔 뒤 FA 계약을 맺고 연봉만 사상 최고액인 7억을 받는 귀한 몸이 되고도 다시 부상으로 쓰러졌다. 그래서 만약 다시 기적적으로 재기하지 못하는 한 어린 팬들의 기억에 'FA 먹튀'로만 남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빛의 가치는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법이지만, 프로스포츠에서는 조금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 암흑의 시기에는 팬들마저 모두 떠나버리기에, 홀로 빛을 발한 선수를 기억해줄 이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야구장에서 꿋꿋이 팀의 추락을 저지해준 낡고 굵은 기둥의 노고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또다시 고난이 닥칠 때 같은 몫을 자청할 이도 찾기 어려워지게 된다. 그래서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사직구장의 관중석을 끝내 지키며 손민한의 활약에 눈물 흘렸던 이들이라면 '손민한 먹튀'를 씹어 뱉는 경박한 팬들을 향해 혀를 찰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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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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