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2001년은 세 명의 외국인선수가 지배한 해였다. 호세는 62경기 연속출루기록과 역대 최고 출루율 기록(.503)을 세우며 시즌 중 감독을 잃은 초상집 롯데의 희망이 되었고, 5월 중순을 넘겨서야 합류한 갈베스는 첫 8경기에서 3연속 완투승을 포함해 7승을 올리는 압도적인 투구로 삼성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은 정규리그 타점왕에 오른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만 4개의 홈런을 쏘아올린 우즈의 두산이 차지하게 된다.

최고의 타자, '호세'

검은 갈매기, 호세 2001년의 호세는 한국프로야구 30년 역사상 가장 공포스러운 타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해 9월 18일 배영수의 턱에 작렬한 호세의 주먹은 무려 4년간 이어진 롯데 자이언츠의 '꼴찌악몽'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 검은 갈매기, 호세 2001년의 호세는 한국프로야구 30년 역사상 가장 공포스러운 타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해 9월 18일 배영수의 턱에 작렬한 호세의 주먹은 무려 4년간 이어진 롯데 자이언츠의 '꼴찌악몽'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 롯데 자이언츠


그 해 홈런왕은 39개를 넘긴 이승엽이었고, 타점왕은 113타점의 우즈였다. 하지만 그 해 최고의 타자는 단연 펠릭스 호세였다. 99년에 이미 마해영, 박정태와 클린업트리오를 이루어 롯데 자이언츠를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던 호세는 2001년, 더욱 압도적인 모습으로 한국무대에 복귀했다.

6월 20일과 21일에는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연속게임 만루 홈런을 날렸고, 6월 17일부터는 무려 62경기 연속경기 출루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 기간 동안 무려 77개의 볼넷을 얻었는데, 그 대부분이 넓게 보자면 '고의'에 의한 것들이기도 했지만 특히 포수가 일어선 채 네 개의 공을 받은 경우만 하더라도 20개에 달할 정도였다(시즌 내내 얻은 볼넷은 127개, 고의사구는 28개였다).

물론 그것은 호세의 압도적인 위력 때문이었다. 그는 정확성(.327의 타율)과 힘(36개의 홈런)을 겸비한 타자였을 뿐 아니라, 투수의 유형에 따라 좌우타석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스위치타자이기도 했다. 물론 좌우 어느 타석에서라도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파워까지 갖추고 있었고, 실제로 1999년 5월 29일에는 전주 쌍방울 레이더스전에서 4회와 8회,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서 홈런을 날려 '최초의 한 경기 좌우타석 홈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해 롯데 자이언츠에서 호세를 제외하면 경계할 만한 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두 해 전의 파트너 마해영과 임수혁이 자리를 비웠고, 박정태는 2할 5푼에도 못 미치는 타율을 기록하며 깊은 부진에 빠져 있었다. 대신 중거리포 조경환이 3할 언저리의 타율에 33개의 2루타를 때려내며 뒷받침하고 있었지만, 파괴력이라는 면에서 99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상대 투수들은 호세와 대결해야 하는 부담을 한 개의 출루와 간단히 맞바꾸고도 그리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1년은 순위 싸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해이기도 했다. 삼성과 현대가 시즌 내내 멀찍이 앞서나가긴 했지만, 4위 팀과 8위 팀의 격차가 결국 2경기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그 치열한 어깨싸움의 와중에 최하위로 처져있던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은 롯데 자이언츠는 우용득 감독대행을 중심으로 4강 복귀를 다짐했고, 그 반격의 중심에는 물론 호세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6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리며 막판 총력전을 벌이던 2001년 9월 18일, 마산구장에서 빈볼을 둘러싸고 벌어진 몸싸움이 두 선수와 두 팀의 운명에 생각보다도 훨씬 커다란 파장을 남겼다. 그 날 롯데가 4대 3으로 앞서있던 7회 말, 삼성 투수 배영수는 호세에게 거푸 세 개의 공을 몸 쪽으로 던진데 이어 네 번째 공마저 등 뒤로 던져 1루로 내보냈고, 다음 타자 얀에게마저 팔꿈치를 때리는 공을 던졌다.

그러자 화가 난 타자 얀이 타석을 벗어나 마운드를 향해 두어 걸음을 뗐고, 주심과 포수가 얀을 막아서려던 순간 모두의 시야 밖에 있던 1루 주자 호세가 마운드를 향해 돌진했다. 배영수의 왼쪽 뺨을 향해 체중이 제대로 실린 호세의 라이트 훅 펀치가 날아들었고, 배영수는 그대로 그라운드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호세는 남아있던 정규리그 8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그제껏 이어가던 연속경기 출루 기록을 62에서 마감해야 했다. 물론 이승엽과 한 개 차이로 각축을 벌이던 홈런왕 경쟁도 포기해야 했고, 그 홈런왕 타이틀만 얹는다면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었을 시즌 MVP의 영예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롯데 자이언츠였다. 그 해 117경기에서 36홈런 102타점 .335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주포를 잃은 롯데는 6위에서 8위로 미끄러졌는데, 그것은 역대 팀 최다연속기록인 4년 연속 꼴찌행진의 출발점이었다.

그 해 겨울 롯데와 메이저리그 몬트리올 엑스포스 사이에서 이중계약을 맺은 호세는 롯데의 요청에 의해 KBO로부터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고, 그렇게 수년간 사라져간 중심타자들의 빈자리를 홀로 메워내던 호세라는 거대한 기둥이 뽑혀나간 자리를 롯데 자이언츠가 다시 채워 넣기까지는 적어도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고의 투수, '갈베스'

물론 배영수에게도 후유증은 있었다. 그는 그 해 13승을 거둔 거물이긴 했지만, 아직 여린 입단 2년차의 신인일 뿐이었다. 그는 그 사건 뒤로 단 1승도 보태지 못하며 다승왕 경쟁에서 하차한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아무런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서 아쉬운 한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무려 7경기차로 정규시즌을 마친 뒤 한국시리즈로 직행했던 삼성 라이온즈가 3위팀 두산에 2승 4패로 밀리며 우승컵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 데는 더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바로 '약 준 다음 병을 준' 그 해 최고의 투수 갈베스였다.

카리브의 괴인, 갈베스 일본 프로야구 다승왕 경력의 갈베스는 2001년 한국무대에 오르자마자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하며 연승행진을 벌였고, 삼성 라이온즈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해 삼성이 13.5경기차의 3위팀 두산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내주어야 했던 것 역시 갈베스 때문이었다.

▲ 카리브의 괴인, 갈베스 일본 프로야구 다승왕 경력의 갈베스는 2001년 한국무대에 오르자마자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하며 연승행진을 벌였고, 삼성 라이온즈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해 삼성이 13.5경기차의 3위팀 두산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내주어야 했던 것 역시 갈베스 때문이었다. ⓒ 삼성 라이온즈

199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일본 프로야구 다승왕까지 올랐던 화려한 경력의 갈베스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2001년 5월이었다.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의 머리를 향해 강속구를 던진 적이 있을 만큼 거칠었던 성격 탓에 일본 무대를 떠나야 했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했던 그를 영입하기 위해 삼성 라이온즈는 규정을 어겨가며 100만 달러 이상의 뒷돈을 써야 했다.

그리고 한 달 여 늦게 레이스에 뛰어든 갈베스는 연전연승하며 곧장 투수 각 부문 타이틀 경쟁에 끼어드는 괴력을 선보였다.

첫 8경기에서 1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며 7승을 따내는 놀라운 페이스였고, 전문가들은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세 부문의 유력한 승자로 주저없이 갈베스를 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창용(14승), 배영수(13승), 김진웅(11승)으로 이어지는 토종 10승대 선발진에 슈퍼에이스급 외국인 투수 갈베스가 가세한 삼성의 우승을 의심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그 해 삼성의 사령탑은 해태 타이거즈 9회 우승의 주역 김응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치고 올라온 두산 베어스에게 먼저 1차전을 따내고도 2승 4패로 밀리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첫 우승에 실패하고 만다. 원인은 가장 강한 고리에 생긴 균열, 즉 갈베스와 배영수로 이어지는 선발진의 부진이었다.

물론 배영수의 부진은 역시 호세와의 난투극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갈베스의 이해할 수 없는 자멸이었다. 10승을 채우며 계약서 이면의 옵션을 모두 채운 갈베스는 갑자기 모든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무기력해졌고, 특히 위독한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명목으로 8월 20일에 출국한 뒤 십여 차례에 걸친 약속을 어긴 끝에 45일만인 10월 4일에야 귀국하는 파행까지 일삼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수단 내부에는 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김응용 감독의 한국시리즈 구상도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다.

결국 갈베스는 한국시리즈 1,4차전에 선발로 나서 6이닝 10실점으로 무너졌고, 꼭 잡아야 할 경기에서 오히려 가장 무기력하게 패퇴한 삼성 역시 한국시리즈 우승의 꿈을 다시 미루어야 했다.

하지만 MVP는 우즈

반면 한국프로야구가 외국인에게 문호를 열었던 1998년, 곧바로 장종훈의 시즌 최다홈런기록을 깬 42홈런을 날리며 정규리그 MVP에 선정되었던 우즈는 2001년에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물론 4년째 꾸준한 활약이기는 했지만 타율(.290)과 홈런(34)이 예년보다 조금씩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보다 훨씬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외국인 호세와 갈베스에게로 언론의 주목이 옮겨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흑곰, 우즈 한국프로야구의 첫 번째 외국인 스타. 우즈는 1998년부터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였지만, 2001년에는 경력과 능력 면에서 모두 그보다 한 수 위인 호세와 갈베스에게 시선을 빼앗겨야 했다. 하지만 그 해 최후의 승자는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우즈였다. 그의 무기는 절박함과 진지함, 그리고 냉철함이었다.

▲ 흑곰, 우즈 한국프로야구의 첫 번째 외국인 스타. 우즈는 1998년부터 내내 꾸준한 활약을 보였지만, 2001년에는 경력과 능력 면에서 모두 그보다 한 수 위인 호세와 갈베스에게 시선을 빼앗겨야 했다. 하지만 그 해 최후의 승자는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우즈였다. 그의 무기는 절박함과 진지함, 그리고 냉철함이었다. ⓒ 두산 베어스


우즈는 소문난 몸싸움을 벌인 적도 없었고, 특이한 기행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도 없었다. 언론을 향해 자극적인 말을 내뱉는 편도 아니었고, 그저 카메라를 들이대면 낼름 혀를 내밀며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일면을 내비치는 정도로 팬들과 교감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기복 없는 활약으로 '조용한 강자'의 모습을 시즌 내내 이어갔고, 113타점으로 그 해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는 .391의 고타율에 4홈런 8타점을 몰아치면서 한국시리즈 MVP마저 석권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출신의 호세, 혹은 일본 프로야구 다승왕 출신의 갈베스와 비교하면 마이너리그에서만 10년을 구른 우즈의 경력은 일천했고, 냉정하게 보면 재능이나 강점도 그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것이 우즈였다. 하지만 그의 무기는 '야구로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절박함과 진지함이었고, 그것이 끝내 한국프로야구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서 그를 꼽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있어서 재능과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수준을 가르는 진정한 기준은 그 재능을 일깨워줄 겸손함과 성실함, 그리고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줄 진지함과 냉철함이다. 2001년은 세 명의 외국인선수들을 통해 어느 때보다도 선진야구의 위력을 실감한 해이기도 했지만, 그 세 명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성실함과 진지함이 가지는 가치를 되새긴 시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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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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