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가장 냉엄한 심판자다. 더없이 화려한 성취도 시간 앞에선 퇴색되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영광은 보잘 것 없는 소동이 되고, 어느 성공은 도리어 야비한 술수의 결과로 드러난다. 걸작이라 평가됐던 작품이 완전히 잊히는 것도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다. 잔뜩 휘저어진 흙탕물을 말끔히 정돈하듯, 시간은 남겨질 것과 사라질 것을 가름하는 가장 권위 있는 심판자로서 제 역할을 완전히 수행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끌어내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따금 재평가되는 작품도 있다. 당대 시장에선 외면 받았으나 훗날 그 가치가 인정돼 다시금 바라보게 되는 경우다. 시간 앞에 퇴색돼 그 매력이 사라지는 작품이 여럿이라지만, 몇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매력만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이런 작품을 대면하자면 왜 그때는 몰랐을까 하는 한탄이 절로 새어나오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걸작들이 당대의 성공작을 훌쩍 뛰어넘는 가치로 평가되는 것도, 초판도 팔지 못한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거나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의 사례 또한 유명하다.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퇴색되지 않는 무엇, 작품이 영속하는 생명력을 얻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