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역사공부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조선초기에 있었던 '계유정난'이라는 사건에 대해 한 번쯤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계유정난은 1453년(계유년),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는 단종이 폐위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고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대표적인 '쿠테타'로 기억되고 있다.

계유정난은 조선역사에서 워낙 의미가 있었던 사건이었던 만큼 대중매체에서도 많이 다뤄졌다. 1994년에 방송된 KBS 대하사극 <한명회>가 대표적이었는데 수양대군의 책사였던 한명회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로 이덕화 배우가 한명회, 서인석 배우가 수양대군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이 밖에도 <왕과 비>와 <공주의 남자>,<인수대비> 등 많은 사극 드라마에서 직·간접적으로 계유정난을 다룬 바 있다.

드라마에서 계유정난이 꾸준히 소재로 사용되는 것에 비해 영화에서는 좀처럼 계유정난을 다루는 작품이 없었다. 그러던 2013년, <우아한 세계>로 2007년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던 한재림 감독이 6년 만에 선보인 신작에서 계유정난을 정면으로 다뤘다.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관상가가 개입됐다는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가상역사물'이었던 송강호, 이정재, 김혜수, 조정석 주연의 <관상>이었다.
 
 2013년9월에 개봉한 <관상>은 <명량>,<광해>,<왕의 남자>에 이어 역대 사극 흥행 4위에 올라있다.

2013년9월에 개봉한 <관상>은 <명량>,<광해>,<왕의 남자>에 이어 역대 사극 흥행 4위에 올라있다. ⓒ (주)쇼박스

 
다양한 장르의 연기가 가능한 만능배우

지난 2020년과 2021년에 걸쳐 방송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에서는 시청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이 주요배역을 맡아 기대 이상의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채송화 역의 전미도와 이익순 역의 곽선영, 도재학 역의 정문성, 추민하 역의 안은진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모두 매체연기가 익숙하지 않은 신예에 가까웠지만 수 년간 뮤지컬 활동을 통해 잔뼈가 굵은 배우들로 <슬의생>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미도나 곽선영 등에 비하면 이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배우였지만 이익준을 연기한 조정석 역시 2004년부터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며 착실히 연기경력을 쌓은 배우였다. 2008년에는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으로 한국뮤지컬대상 신인상, 2009년에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과 2011년에는 유능한 젊은 남자배우들이 거쳐 가는 <헤드윅>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렇게 무대 연기에 익숙해지던 조정석은 2012년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 분)의 친구 납뜩이를 연기하며 주연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12년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을 통해 영화 주연으로 데뷔한 조정석은 드라마 <더킹 투하츠>와 <최고다 이순신>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다. 그리고 2013년 영화 <관상>에서 조카를 끔찍이도 아끼는 수다쟁이 삼촌 팽헌을 연기하며 913만 관객 동원에 기여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4년 현빈,정재영,한지민 등과 이재규 감독의 <역린>에 출연한 조정석은 같은 해 신민아와 이명세 감독의 1990년 영화를 리메이크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통해 214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6년에는 도경수와의 형제연기가 돋보였던 <형>으로 3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믿고 볼 수 있는 흥행배우로 올라섰다. 2018년 가수 거미와 결혼한 조정석은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8년 <마약왕>, 2019년 초 <뺑반>의 흥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듯 했던 조정석은 2019년 여름 942만 관객을 웃긴 <엑시트>를 통해 <관상>을 넘는 커리어 최고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조정석은 코로나19로 극장가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를 통해 변함없는 인기를 구가했고 현재는 추창민 감독의 영화 <행복의 나라> 촬영을 마친 후 지난 3월부터 신세경과 드라마 <세작>을 촬영 중이다.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등장신 나오는 영화
 
 송강호(왼쪽)와 조정석은 <관상>에서 친형제처럼 돈독한 처남-매형 사이를 연기했다.

송강호(왼쪽)와 조정석은 <관상>에서 친형제처럼 돈독한 처남-매형 사이를 연기했다. ⓒ (주)쇼박스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종종 기복을 보이기도 하지만 2013년 당시만 해도 송강호는 범접할 상대가 없는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보증수표였다. 실제로 2013년에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영화 세 편(<설국열차>,<관상>,<변호인>)은 무려 2984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3년 추석시즌에 개봉했던 <관상> 역시 <스파이>와 <컨저링>,<몬스터 대학교>,<슈퍼배드2> 등 국내외 경쟁작들을 여유 있게 제치고 추석시즌의 승자로 등극했다.

영화 <관상>은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미래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천재 관상가 김내경(송강호 분)이 한양으로 올라와 조정의 일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한재림 감독의 깔끔한 연출과 이야기 진행도 흠 잡을 곳이 없지만 송강호와 이정재, 김혜수, 조정석, 백윤식, 이종석, 김의성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 만으로도 139분의 런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관상>은 2010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주최한 한국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의 대상 수상작이다. 하지만 <관상> 역시 한재림 감독이 각색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설정들이 변했다. 실제로 김혜수가 연기한 한양 최고의 기생 연홍은 시나리오에서는 여성이 아닌 남자 캐릭터였고 조정석이 맡은 팽헌도 각색과정에서 한재림 감독이 새롭게 추가한 캐릭터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크게 흥행했으니 한재림 감독의 각색은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관상>에는 '한국영화 3대 등장신'이 있다. 실제로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끝까지 간다>의 조진웅과 함께 '한국영화 3대 등장신'으로 꼽히는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신은 영화 시작 57분 만에 나왔음에도 <관상>의 '진주인공'이 이정재임을 관객들에게 알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좋은 배우는 비중을 가리지 않는다
 
 김혜수가 연기한 연홍은 초야에 묻혀 있던 관상가 김내경을 한양으로 데려오면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역할을 한다.

김혜수가 연기한 연홍은 초야에 묻혀 있던 관상가 김내경을 한양으로 데려오면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역할을 한다. ⓒ (주)쇼박스

 
사실 <관상>의 연홍은 김혜수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스타배우가 연기하기엔 비중이 그리 큰 캐릭터는 아니었다. 물론 내경의 실력을 눈치채고 내경, 팽헌을 한양으로 데려오며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긴 하지만 내경이 계유정난에 본격적으로 말려들면서 연홍의 비중은 급격히 작아진다. 하지만 김혜수는 어떤 역할을 맡아도 최선을 다하는 배우답게 <관상>에서도 자신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2012년 <코리아>와 <R2B: 리턴 투 베이스>에 출연했지만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이종석은 <관상>에서 김내경의 금쪽 같은 아들 김진형 역을 맡아 단숨에 900만 배우에 등극했다. 진형은 한양에서 가명으로 과거를 봐 관리에 등용되지만 한명회의 계략에 말려 김종서의 수하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습격을 당해 눈이 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수양이 쏜 화살에 맞아 내경의 품에서 허무하게 숨을 거둔다.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카리스마 넘치는 포스를 발휘하며 고수 또는 달인 전문배우의 이미지를 가진 백윤식 배우는 <관상>에서 호랑이상을 가진 조선 초기의 좌의정 김종서 역을 맡았다. 

<부산행>과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천하의 나쁜 놈, <극한직업>에서는 유쾌한 경찰간부, <모범택시> 시리즈에서는 정의로운 무지개 운수 대표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김의성은 <관상>에서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를 연기했다. 한명회는 영화 중반까지 제대로 얼굴이 나오지 않다가 김종서 사망 후 얼굴을 드러내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하지만 사망 후 연산군 시절에 부관참시를 당하며 김내경의 예언처럼 '목이 잘릴 팔자'가 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관상 한재림 감독 송강호 조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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