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7월에 개봉(북미기준)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는 세계적으로 10억3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슈퍼히어로 영화 최초로 세계흥행 10억 달러를 돌파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2001년 <메멘토>, 2005년 <배트맨 비긴즈>, 2006년 <프레스티지> 등 완성도 높은 수작을 꾸준히 연출하고도 '메가 흥행작'을 내지 못하던 놀란 감독은 <다크 나이트>를 통해 작품성과 흥행파워를 겸비한 감독으로 거듭났다.

물론 <다크 나이트>는 워낙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은 <다크 나이트> 개봉을 6개월 앞둔 2008년1월 세상을 떠난 고 히스 레저의 유작이었기 때문이다. 히스 레저는 자신의 실질적인 마지막 작품(진짜 유작은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 역을 맡아 배트맨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발휘하며 열연을 펼쳤고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사후 수상했다.

<다크 나이트>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했지만 사실 히스 레저는 2001년 <기사 윌리엄>과 <몬스터 볼>,2005년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은 전설> 등에 출연하며 연기력과 스타성을 두루 갖춘 젊은 배우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히스 레저는 2005년 연말에 개봉한 이 영화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안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퀴어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1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제작비의 12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1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제작비의 12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기록했다.유니버설 픽쳐스 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상업영화

퀴어영화는 성소수자의 인권신장을 주제로 한 영화를 의미한다. 초기에는 실제 성소수자인 감독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영화에 담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김조광수 감독의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반 상업영화에서도 성소수자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소재'로 사용되면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 <동사서독> 등을 연출했던 90년대 '아시아 영화의 거장' 왕가위 감독은 1997년 고 장국영과 양조위라는 중화권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해 퀴어영화 <해피 투게더>를 만들었다. 동성애라는 파격적인 소재 때문에 개봉 전후 관객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해피 투게더>는 그 해 칸 영화제에서 왕가위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기며 왕가위 감독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린 작품이 됐다.

트랜스젠더 로커의 이야기를 담은 <헤드윅>은 영화보다 뮤지컬로 더욱 유명한 작품이다. 2002년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한 후 2005년부터 뮤지컬이 공연되기 시작한 <헤드윅>은 지금까지 13번의 공연이 열리며 조승우와 조정석, 김재욱, 윤도현, 오만석, 유연석, 변요한, 이규형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연기했다. 영화 역시 미국의 영화평론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와 관객점수에서 모두 93%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한국영화 중에는 지난 2005년 연말에 개봉해 1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세 번째로 천만 영화가 된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퀴어영화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물론 공길(이준기 분)을 향한 연산군(정진영 분)의 집착은 동성애라기 보다는 애정결핍에 가깝다는 의견이 우세하지만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연산군과 공길의 키스 장면은 관객들 사이에서 여러 해석이 엇갈렸다.

<왕의 남자>가 퀴어영화의 느낌이 살짝 묻어있는 영화라면 지난 2016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더욱 노골적인 퀴어 영화에 가까웠다.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은 일본인 귀족 이즈미 히데코(김민희 분)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하인으로 잠입한 남숙희(김태리 분)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여느 퀴어 영화와 달리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거의 없는 것도 <아가씨>의 특징이었다.

제작비의 13배 흥행성적 올린 멜로영화
 
 에니스(오른쪽)와 잭은 결혼 후에도 낚시여행 등을 핑계로 두 사람만의 은밀한 만남을 이어갔다.
에니스(오른쪽)와 잭은 결혼 후에도 낚시여행 등을 핑계로 두 사람만의 은밀한 만남을 이어갔다.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대만출신의 이안 감독은 지난 2000년 중화권 배우들만 출연했던 무협영화 <와호장룡>을 통해 북미에서만 1억28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비영어권 영화 북미 최고흥행기록이다. 이안 감독은 <와호장룡> 이후 2003년 1억37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헐크>를 연출했고 2005년에는 이안 감독에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긴 <브로크백 마운틴>을 선보였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직업 알선소에 갔다가 만난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 분)와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 분)가 한 조를 이뤄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곳에서 양떼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동성애가 금기시됐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터프한 남성을 상징하는 카우보이 사이에서 싹트는 동성애를 소재로 하고 있어 국내는 물론 서양권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상당히 애틋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산을 내려와 각각 로린(앤 해서웨이 분)과 알마(미셀 윌리엄스 분)라는 여성과 결혼을 해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었다.  잭과 에니스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코 용서받기 힘든 사랑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안 감독은 두 사람의 사랑을 단순히 성소수자의 욕정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애절한 멜로드라마로 풀어내며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다크 나이트>에서 하이톤의 장난스런 말투를 가진 싸이코 범죄자 조커를 연기했던 히스 레저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시원시원하고 거친 이미지의 상남자 에니스를 연기하며 상반된 매력을 뽐냈다. 재미 있는 사실은 <다크 나이트>의 놀란 감독이 <브로크백 마운틴>을 본 후 히스 레저에게 조커 역을 맡기겠다고 결심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히스 레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까운 배우다.

제이크 질렌할은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3부작에서 피터 파커,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3부작에서 브루스 웨인 역에 언급됐다가 최종적으로 토비 맥과이어와 크리스찬 베일에게 자리를 내줬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질렌할은 2017년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서 괴짜 동물학자 겸 수의사 닥터 조니를 연기했고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는 미스테리오 역을 맡아 명연기를 펼쳤다.

청춘스타 엔 헤서웨이의 용기 있는 도전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청춘스타 앤 해서웨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연기의 저변을 한층 넓혔다.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청춘스타 앤 해서웨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연기의 저변을 한층 넓혔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브로크백 마운틴>이 두 남자가 외진 곳에서 함께 일을 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영화라는 것은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잭과 에니스는 할리우드에서 손 꼽히는 미녀스타들과 결혼한다. 로데오 대회에서 잭을 만나 결혼하는 부유한 사업가의 딸 로린을 연기한 배우는 <프린세스 다이어리> 시리즈를 통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청춘스타 앤 해서웨이였다. 

당시 이안 감독은 영화 속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로린 역에 유명한 배우를 캐스팅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해서웨이가 <프린세스 다이어리2>를 촬영하던 중 <브로크백 마운틴>의 오디션을 보러 오면서 운 좋게 출연이 성사됐다. 밝고 명랑한 카우걸에서 냉정한 사업가로 변해가는 로린 역을 잘 소화한 해서웨이는 2010년에 개봉한 로맨스 영화 <러브&드럭스>에서 제이크 질렌할과 5년 만에 재회했다.

에니스의 아내 알마를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에게도 <브로크백 마운틴>은 배우로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남편이 동성애자임을 서서히 알게 되는 현실적인 아내 역할을 섬세하게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는 2006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미셸 윌리엄스는 <브로크백 마운틴> 출연을 계기로 히스 레저와 교제하고 약혼까지 했지만 2007년에 파혼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이안 감독 고 히스 레저 제이크 질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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