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일의 연인들> 스틸컷

영화 <내일의 연인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살아가는 동안에 내일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촉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상은 그나마 나은 쪽에 속한다. 관계나 감정, 생사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내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지금 당장은 안정적이고 좋아 보여도 다가올 내일에는 어떤 모습이 될지 조금도 알 수 없는 것들. 우리의 걱정은 그곳에 있다. 확인을 받고 공언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또한 다음 날의 모양이나 상태를 오롯이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의 불안이나 의심을 잠시나마 내일로 미뤄둘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든다.

영화 <내일의 연인들>에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남녀가 등장한다. 우연히 생긴 둘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쌓고 사랑을 키워나간다. 대화 방식도 사랑을 하는 모양도 처음부터 닮아 있던 이들에게는 별다른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서로가 지금 모습 그대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두 사람이다. 문제는 그런 관계에도 불안이 싹을 틔운다는 것이다. 함께가 아니라 혼자가 되는 적막한 시간에, 다른 누군가의 이별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에, 상대가 없는 내일을 상상하게 되는 순간에, 이들은 현재와 상관도 없는 일로 힘들어한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의 일이지만, 어쩌면 영영 찾아오지도 않을 불안한 미래의 가정일 뿐이지만 말이다. 지금 헤어진 다른 사람들의 시간도 그러했을 것이므로, 어쩌면 자신들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이 작품은 정영수 소설가가 쓴 동명의 원작 소설 '내일의 연인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패했거나 실패가 예감되는 연인들의 모습을 통해 연인 관계의 시작과 지속, 그리고 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영화 역시 동일선상에 있다. 헤어진 시간을 떠올리는, 아직 헤어지지 않은 두 남녀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는 그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02.
대학원생인 정안(우지현 분)은 어느 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며 알고 지냈던 선애 누나(박소진 분)의 연락을 받는다. 5년 만에 연락이 닿은 선애는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문제는 집이다. 선애는 정안에게 전남편과 함께 살던 빌라가 팔릴 때까지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정안 역시 그 제안을 반갑게 여긴다. 그 집이 자신의 학교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이제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 지원(이태경 분)과도 함께 지낼 수 있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공간은 이 작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영화가 전남편과의 공간을 처분하기 위한 선애의 연락으로, 또 연락을 받은 정안이 그 공간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는 곳이자, 또 다른 관계가 끝맺는 장소. 정안과 지원의 관계 사이에서 두 사람이 첫 섹스를 나눌 장소를 깊이 고민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생애 처음으로 몸의 대화를 나눌 대상은 아니지만, 이 관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행위를 뻔하고도 허름한 모텔이라는 공간에서 이루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선애의 사랑이 끝난 자리에 정안의 새로운 사랑이 시작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아 영화가 한 공간에 하나의 사랑이 자리해야 하는 식의 대응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 더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언제 어떻게 시작될지 알 수 없는 관계다. 이는 누가 차지하더라도 항상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존재할 공간의 모습과 대비된다. 영화적 대응성은 여기에 있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항상 같은 모습이 될 사람의 외면과 공간의 외면(건축물의 외관)은 거의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이라 할 수 있는 감정과 관계적인 면들은 누가 머물게 되느냐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 갈 공간의 내면과 상응하며 이에 가변적인 부분이 있음을 강조하게 된다.
 
 영화 <내일의 연인들> 스틸컷

영화 <내일의 연인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우리 모두는 서로를 구원할 사람을 찾고 있지만 사실은 그냥 구원이 필요했던 두 사람일 뿐인 게 아닐까?"

정안이 머물게 된 선애의 집에서, 다시, 이제 정안과 지원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집에서 예정에도 없는 첫 섹스를 나누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공간의 또 다른 측면을 부각하는 지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공간의 지점이 변하지 않는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외면과 대비되는 측면에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부분이 우리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쪽이었다면,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공간의 속성은 그런 변하지 않는 속성이 내부의 존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 된다. 이는 두 사람의 가정사와 관계된 이야기다.

먼저 정안의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권력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 인해 정안의 어머니는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아야 했고, 아버지는 자신의 과오를 돈으로만 해결하고자 했다. 실제로 정안이 선애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그의 어머니는 그냥 본가로 들어와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정안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런 어머니가 밑도 끝도 없이 아빠만 한 사람이 없다며 옹호할 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은 자신의 속에 남아 있다가 다시 자신을 통해 나오기도 한다고 말한다.

반면 지원의 집도 그들의 식으로 힘들었다. 가난도 폭력도 없었지만 군인이었던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가족 모두가 그에게 종속된 듯 살아야만 했다. 어느 사이에는 모두 그렇게 길들여져 버려서 견딜 수 없이 힘들 때에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단다. 그녀 역시 두 사람의 집에 머물다가 막차 시간만 되면 억지로 잠을 깨워서라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제 서른도 다 되어가는데.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 정안은 그런 공간의 영향으로 인해 때때로 말이 좀 독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며, 지원은 그런 공간을 생각했을 때 종종 힘이 든다고 느낀다. 공간(고정적)이 내면(가변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 지점의 대화가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공간이란 하나의 개체이자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며 그렇게 형성된 가변적 요소는 우리의 내일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이룩하게 되는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공간에서 완성된 불완전한 대상과 또 다른 하나의 공간에서 완성된 불완전한 대상이 만나게 되는 곳이며, 그렇기에 그 공간 역시 불완전한 곳으로써 우리의 내일을 알 수 없게 만든다.
 
 영화 <내일의 연인들> 스틸컷

영화 <내일의 연인들>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4.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정안은 선애를 만나 이제 끝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그동안 살던 곳과는 다른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선애가 세상에 한 번도 있어 본 적 없던 올곧이 자신만의 취향으로 만든 공간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결혼하기 전 자신을 지극히도 아끼고 사랑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다.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오랜 시간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던 그 남자에 대해 선애는 이렇게 말한다. 전남편을 만나고 그렇게 곧바로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병원에 계속 머물던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을 거라고. 아마, 전남편과의 관계 역시 이렇게 이혼이라는 이름으로 끝날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끝을 냈을 것이다.

그녀와 헤어진 뒤에 정안은 홀로 남겨진 어두운 집 안에서 깊은 생각에 빠진다. 이 공간에서 행복한 시작을 했던 두 사람이 맞이한 이별과, 자신이 지나온 여러 번의 이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랑, 지원과의 관계 역시 내일이면 어떤 모습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려는 지원에게 정안은 처음으로 같이 있어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아직 아버지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지원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선애는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알 수가 없다고. 그런 종류의 일들은, 왜 만나는지, 또 왜 헤어지는지와 같은 일들은 지나고 보면 다 모르겠다고 말이다. 살다 보면 그냥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오기도 한다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정안은 선애가 왜 그렇게 헤어졌을지 묻는다. 곁에 누워있던 지원이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라고 대답하려고 하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안이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매일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곁에 머물던 날 밤의 일이다.

두 사람의 사랑도 내일이면 어떤 모습이 될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장 내일 헤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 그 공간에서 다른 누군가가 제 사랑을,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겠지만 이제 지나가버린 선애의 사랑처럼 이들의 사랑도 끝을 맺게 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내일은 알지 못하지만, 아직 오늘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곁에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벗어난 지원의 선택이, 자신의 슬픔을 독한 소리가 아니라 곁에 있어달라는 솔직한 표현으로 꺼낸 정안의 마음은 그래서 의미를 가진다. 내일의 연인들은 오늘의 연인들로 인해 또 하루를 살 수 있게 될 테니까.
덧붙이는 글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세 번째 큐레이션 ‘일대일의 관계’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8월 15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내일의연인들 정영수 소설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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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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