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렌치 수프>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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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영화의 태도가 명백하기에, 이야기 전개 역시 프랑스 요리의 정수를 나눠 가진 몇 개의 요리들을 통해 구현된다. 무수한 메뉴가 가득 등장하지만 그 핵심이 되는 개별 요리들의 제조과정과 정체성은 곧 <프렌치 수프>가 선보이려 하는 이야기의 주제와 직결된다. 영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될 지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30분간 진행되는 첫 번째 만찬은 정석적인 코스 순서로 진행된다. 원래 프랑스 요리는 화력을 집중하듯 거대한 상에 오만가지 메뉴가 과시적으로 올라오던 '오트 퀴진', 즉 중세 왕후와 귀족들의 시끌벅적한 성찬이지만 근대 이후 좀 더 간소하고 손님을 배려하는 '누벨 퀴진'으로 변모해 갔다. 그리고 음식이 빨리 식거나 굳어버리는 걸 막기 위해 시간차를 활용한 코스 요리 개념이 러시아 요리 영향으로 19세기에 도입되기에 이른다. 그런 절차의 기원과 개념을 떠올리며 이 만찬을 즐긴다면 많은 걸 찾아낼 수 있다.
시작은 수프다. 그것도 걸쭉한 '포타주'가 아니라 맑게 걸러낸 '콩소메(Consommé de volaille)'가 출발을 알린다. 앞으로 많은 걸 위장에 집어넣을 이들에게 준비 동작을 위해 적절한 시작점이지만 맛 역시 포기할 수 없기에, 겉보기엔 그저 투명한 국물이지만 그 내용물은 여러 고기와 야채를 잔뜩 끓여내 헝겊으로 그 진액만 맛보기로 내놓은 것이다. 두 번째로는 프랑스 제빵의 자랑 중 하나인 '페이스트리'가 차지한다. 그런데 그저 수십 수백 겹으로 첩첩 쌓인 페이스트리가 아니다. 속을 파내고 수십 종류의 고기와 해산물, 야채를 소스로 버무려 채운 뒤 빵 껍질로 뚜껑을 덮은 채 등장한 이 요리 '볼로방(Vol-au-vent)'부터 대체 무슨 맛이 날까 침샘이 폭발할 법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리가 선망하는 빵 속에 수프가 채워진 요리의 끝판왕 격이다.
그리고 뒤이어 푹신한 스펀지케이크 속에 아이스크림을 채우고 머랭으로 덮어 오븐에 구운 디저트가 등장한다. 겉은 불기운이 살아 있는데 속의 아이스크림은 녹지 않았다. '오믈레트 노르베지엔(Omelette norvégienne)', 노르웨이산 오믈렛이다. 아마 이 요리를 처음 만든 셰프는 온통 눈으로 덮인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하길 기대했을 테다. (감독의 이전 작품 중 하루키의 소설을 각색했지만 망작으로 혹평받은 <노르웨이의 숲>과 묘하게 연결되는 대목이다) 요리사는 천지창조도 가능케 하는 '예술가'라는 격찬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영화감독이 화면 속 세계를 창조하듯 요리사도 가능하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제 시련의 순간이다. 외국 왕자의 도전에 참전하기 전 도댕과 친구들은 외제니가 아닌 다른 요리사의 음식을 맛보려 외딴 자리를 찾는다. 앙토냉 카렘의 뒤를 이어 프랑스 요리계의 거목이자 전환점 역할을 한 오귀스탱의 레시피에 따른 '오르톨랑(Ortolan)' 시식회다. 멸종위기종인 멧새 '오르톨랑'을 원래 2배로 푸아그라 제조과정처럼 살찌운 뒤 고급 와인에 익사시켜 오븐에 구운 요리다. 그 잔인한 요리법 때문에 현재 종 보호 차원에서 금지되었지만 고 미테랑 대통령이 임종 직전 원래 1개만 먹을 수 있는 걸 2개나 먹었다는 비화처럼 환상의 미식으로 유명한 이 오르톨랑을 전해지는 시식 과정을 완벽 재현해 선보인다. 궁금하다면 영화에서 확인해 보시라.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직후 연결되는 왕자의 8시간 만찬은 그저 스치듯 지나쳐버린다. 극 중 손님들이 평가하듯 굳이 언급할 의의가 없는, 프랑스 요리의 외형만 갖췄을 뿐 실제 정신과는 무관하다는 문화적 자부심에 의한 것일 테다.
그 대신 소개되는 요리법과 결과물은 언뜻 소박하고 평범해 보인다. 도댕은 원인불명의 증상으로 자꾸 쓰러지는 외제니를 염려해 손수 수프를 끓인다. 어릴 적 자식들이 속에 탈이 나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발을 구르며 만들어주시던 죽을 떠올리면 공감이 쉬운 순간들이다. 도댕 역시 조금이라도 먹고 기운이 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조심스레 간을 보고 수프를 우려낸다. 닭죽이나 삼계탕이 보양식이듯 도댕 역시 치킨 수프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애틋한 노력 덕분에 20년 동안 외제니에게 감히 다가서지 못하던 교감의 단계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 순간을 함께 맞이한 건 아무 특징 없는, 오직 만든이의 마음과 함께 하는 '완두콩 벨루테(Green pea velouté)' 수프다. 콩소메와 달리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보기만 해도 걸쭉하다. 외제니를 위해 수프를 끓이고 요리를 대접하는 정성, 최고의 요리는 남이 해준 음식이란 명제를 증명하듯 외제니는 그가 오랫동안 품었던 의구심, '결혼하고도 문 안 열어줄 권리가 있을까요?'를 거두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 태도변화에 마침표를 찍게 한 건 '푸아르 포셰(Poire pochée)'다. 배의 껍질을 벗긴 후 오랜 시간 졸여만든 달콤한 디저트는 인생에 비견되는 식사의 마무리로 더 바랄 게 없다.
도댕은 왕자에게 프랑스 요리의 정수를 알려주기 위해 초대를 준비한다. 그런데 메인 요리가 충격적이다. 프랑스 서민들의 식탁을 오랜 시간 상징해온 요리이지만 절대로 만찬에 올라올 일은 없던 메뉴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자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외국 정상에게 대접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도댕은 당황해하는 친구들과 외제니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대접할 메뉴표를 소개한다. 그 메인 메뉴가 바로 포토푀(Pot-au-feu)'다. 여러 가지 고기와 야채를 오랫동안 약불에서 서서히 끓여낸 수프다. 아마 프랑스 요리가 그저 화려한 게 아니라 마음과 세상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으로 발달해 왔음을 알리고픈 '진심'의 선택이었을 테다. 이 영화에서 조명되는 요리는 곧 프랑스 문화이자 세상이자 마음인 셈이다.
감독의 화려한 복귀에 담긴 건 그가 품은 세월과 세상을 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