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31일 캐스팅입니다.
안정인
극장 대기 공간 바닥에는 "일제 강점기 인천 부평조병창에서 탄생, 만주로 운송된 후 4.3 사건 시기의 제주를 거쳐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지금은 영화 촬영 소품으로 살고 있는" 장총의 삶을 그린 표가 그려져 있다. 무려 78년이다. 아이가 태어나 장총과 같은 여정을 거치며 78년을 살아왔다면 지금쯤 어떤 외양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있을까. 무엇을 보고 느꼈고, 어떤 말을 들려줄까. 즐거운 기억일까? 악몽 같은 과거일까?
극장에 들어서면 정의하기 애매한 무대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박제된 사슴 대가리가 달려 있는가 하면, 피아노가 있고, 한구석에 칠판이 놓여 있는가 하면 각종 그릇과 형형색색의 보따리도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가정집 거실이라기엔 정신없고 사무실이라기엔 두서가 없다. 영화 소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다. 장총 '빵야'는 이곳 소품실 피아노 위, 세고비아 기타 케이스 옆에 누워 있었다. 언제부터 인지 모른다. 소품 창고 할아버지가 가진 기다란 목록에도 빵야의 이름이 빠져 있었을 정도니까.
역사를 전공하고 드라마 작가가 된 나나는 '잘 나가는' 후배작가의 수상식 뒤풀이에서 공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있었다. 사람들은 나나를 향해 '한물간 작가'라고 수군거리며 '요즘은 뭐 하시냐'고 근황을 물었다. 근래 발표한 작품이 전혀 없다는 소리다.
그때 나나의 눈에 오래된 장총 '빵야'가 들어온다. 정신이 번쩍 든다. 저 총이면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저 소재를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뭔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것도 같은데… 잘만 하면 반 백수 상태인 자신이 새로운 작품으로 계약을 따낼 수 있지 않을까.
나나의 욕망이 장총의 기억을 흔든다. 장총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장총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을 할 수가 없다. 괴롭고 아프고 힘든 과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야아아, 날 한 번만 믿어줘." 콧소리를 내며 장총에게 애교를 부린다. 마침내 장총은 묻는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물론이다. 작가와 장총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그런데 장총의 소원은 무엇일까.
이 연극에는 아홉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등장인물은 몇 명쯤 될까. 대충 잡아도 20명은 넘는다. 장총 '빵야'와 작가 '나나'를 제외한 일곱 명의 배우들이 나머지 모든 배역을 해낸다. 기무라 역의 배우는 나나의 선배가 되기도 하고, 무근이 됐다가 박만근으로 나타나고 다시 이름 없는 병사가 되는 식이다. 배우들은 일본군이었다가 팔로군이 되었다가 빨치산이 되기도 하고 토벌대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 정도 되면 무대 뒤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일이 무의미하다. 아홉 명의 배우는 무대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나 자신의 역할을 소화한 뒤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도 인생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것은 아니었을까. 평범한 아이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대에 끌려갔다 6.25 때에는 북쪽에서 혹은 남쪽에서 총을 들고, 제주에서는 또 어느 편으로 설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한 가지 역할만 하고 살 수 있도록 우리 역사는 내버려 두질 않았다. 한 형제가 남 북으로 나뉘어 총을 든다는 소재는 한때 한국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