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통속 소설이 뭐 어때서> 포스터.

연극 <통속 소설이 뭐 어때서> 포스터. ⓒ 극단수수파보리

 
연극은 '개고기 주사 + 뽕짝 폴카'는 신나는 연주와 함께 시작된다. 무대 안 쪽 키보드와, 타악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3인조 밴드가 보인다. 낯선 노래지만 흥겹고 어깨가 들썩인다. 절로 박자를 맞춘 박수가 따라 나온다.

잠시 후 두 명의 해설자가 등장한다. 1900년대 초 무성 영화의 도입과 함께 스타의 대접을 받던 변사들의 역할을 해 줄 이들이다. 이 해설자들은 장면을 설명하고, 살을 붙이고, 관객의 상태에 반응하며 극을 이끌어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연극이 진행되는 이곳을 20세기 초의 극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때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던 '김말봉'의 인생을 보여주기 위해 이보다 더 판을 잘 벌일 수는 없다.

교과서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소설에 대해 마련된 부분이 있다.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면 염상섭, 김유정, 이상, 박태원 등의 이름 정도는 나열할 수 있다. 하지만 김말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소설가 김말봉의 이야기

무대 위로 걸어 나온 김말봉이 부산 사투리로 하소연을 시작한다.

태백산맥이 뻗어 나와 부산에서 끝이 나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어난 딸에게 '말봉'이란 엄청난 이름을 붙여준 부친의 뜻은 이해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자신은 정말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노라며 김말봉은 한숨을 쉰다. '말봉'이라는 이름을 받은 대부분의 딸들이 했을 법한 이야기다. 생생한 개인으로서 '김말봉'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김말봉은 1901년 태어나 1962년까지 살았던 소설가다. 기자로 시작했지만 곧 소설가로 전업한다. 당시 신문 연재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문에 연재된 소설들이 나중에 책으로 묶이는 경로를 거쳤다.

당시 신문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소설을 지면에 실으며 구독자를 확보했다. '다음 회에 계속'이라는 말에 안달하고 궁금해진 사람들이 다음 신문을 기다려 읽게 만들어야 했다. 당연히 신문 소설에는 보통 사람들이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내용과 감정이 담겨야 했다.

덕분에 그 소설들은 누군가에 의해 '통속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낮게 취급됐다. 하지만 김말봉은 오히려 "통속 소설이 머 어때서'라고 화통하게 소리 지른다. 통속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 대중에게 읽혀야 생명을 갖는다. 생명력이 없는 순수 소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김말봉은 일갈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연극은 그의 이야기 사이 그가 쓴 소설 <찔레꽃>이나 <부인>, <화려한 지옥>의 소설 속 장면을 재현해 보여준다. 그런데 그 장면들이 아침 드라마의 한 회를 보는 것처럼 익숙하다. 게다가 두 명의 해설자는 장면에 감초 역할을 한다. 관객은 편하게 울고 웃으며 김말봉이 그려냈던 당시의 시대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면 된다.

'해방이 될 줄 몰랐기 때문에' 일제에 부역했던 숱한 문인들과 달리 김말봉은 일본어로 글을 써야 하는 현실 앞에서 붓을 꺾는다. 해방될 때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우리는 '해방될 줄 몰랐기 때문에' 글을 쓴 사람들이 아닌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일본어를 몰라서 못 쓴다'라고 우기던 김말봉 같은 작가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 작가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까.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살았던 과거는 기껏해야 운반 중에 잘려 나간 아름다운 형상에 비유될 수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팔과 다리, 그 밖에 도무지 어디가 잘려나간 것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이미 사라져 버리고 남은 것들의 총합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란 왕, 귀족 그러니까 승리자들의 기록, 그중에서도 일부분이다.

세종대왕 시절에 농사를 짓던 개똥이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 방법은 없으며, 일제 강점기 경성의 댄스홀에서 춤추던 만득이에 관해서도 알아내기 힘들다. 미래의 누군가가 2023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한다면, 현재의 대통령이라든가 BTS에 대해 알게 될 확률은 대단히 높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 대해 알 방법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역사책을 들여다보다 보면 과거는 한두 명의 눈에 띄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왕을 끌어내고 지금의 프랑스를 만든 사람들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큰 숨을 몰아쉬며 돌을 던지던 이름 모를 백성들이었다. 동학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며 농기구를 움켜쥐던 선조들이 왕조를 벗어나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을 꿈을 꿨기 때문에 지금의 이 나라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것들, 그 작은 조각들을 모아 형태와 모양을 다시 맞춰야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불러야 한다.

소설을 재연하는 배우들은 당시의 의상을 입고 예스러운 말투로 연기를 펼친다. 과장된 말투와 몸짓에 객석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말봉이라는 개인의 삶의 궤적을 떠나 재연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아마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 중 떨어져 나가 사라질 뻔 한 '김말봉'이라는 조각을 이제야 찾아낸 것 같다. 고마운 마음이다. 이 연극은 7월 9일까지 한성 아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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