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보 마누라 이혼 소송 사건> 포스터

<흥보 마누라 이혼 소송 사건> 포스터 ⓒ 안정인

 
제목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불이 켜지면 법원 경찰이 나타나 배심원들을 무대 위로 안내한다. 즉, 무대 위는 법정이다. 배심원 맞은편에는 연주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고수를 겸하는 타악 연주자와 함께 바이올린과 건반도 보인다. 창극이다. 이렇게 '창극 법정 드라마'의 판이 깔린다.

<흥보가>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원전을 찾아 읽거나 판소리 완창을 듣지 못했더라도 대강의 줄거리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 <흥보가>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스포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흥보가>는 욕심 많고 심술궂은 형 놀보와 착하고 우애 있는 아우 흥보 및 그들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형제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다르게 키웠다. 큰아들 놀보는 일찍부터 돈을 벌게 만들었지만 흥보는 글공부를 시켰다. 놀보는 어렸을 때부터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그런 형을 향해 동생 흥보는 문자를 써가며 훈계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놀보는 흥보와 그의 가족들을 내쫓는다. 벌어오는 것도 없이 착한 척, 아는 척 하는 흥보가 짜증났기 때문이다. 쫓겨난 흥보는 많은 자식들(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판본이나 20명은 훌쩍 넘는다. 이 창극은 아들, 딸 합해서 40명인 판본을 따른다)과 함께 어렵게 살아간다. 그 와중에 흥보의 큰 아들은 장가를 보내 달라고 성화다. 철없기가 아버지 못지않다.

흥보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돈 벌 생각이 없다. 가난해도 양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살까? 아내가 삯 바느질을 하거나 잔칫집 허드렛일을 돕거나 식모 일를 해서 벌어온 것으로 목숨을 연명한다. 몸을 써 돈을 벌면서 스무 명이 넘는 자식을 돌보고, 살림까지 하자면 슈퍼 히어로 대여섯은 관여해야 할 것 같은데, 이 힘든 일을 흥보 마누라씨 혼자 해냈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정신을 못 차린 흥보는 형의 집에 구걸하러 갔다 흠씬 매를 맞고 돌아온다. 답이 없는 남자다.
 
흥보는 곡식을 구걸하러 관아에 가서 매를 대신 맞는 '매품팔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선금조로 돈을 받아 흥청망청 써버린다. 돈을 쓸 때까지는 좋았지만, 다음 날 매를 맞을 생각을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흥보는 매품팔이도 실패한다(판본에 따라 실패하는 이유는 다르다).

어느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 흥보 부부는 다리가 부러져 처마 밑에 떨어져 있는 제비 새끼를 치료해 준다. 몸을 회복하고 건강하게 떠났던 제비가 다음 해 나타나 박씨 하나를 툭 던져 준다. 흥보 마누라는 속은 끓여 먹고 겉은 바가지라도 만들어 볼 요량으로 박씨를 처마 밑에 잘 심고 거름을 주어 기른다.  

팔월 추석이 돌아와 동네 사람들 곳간은 넘쳐나지만 흥보 내외에게는 그림의 떡. 두 사람은 지붕에 달린 박을 먹기로 결정한다. 박을 타자 그곳에는 금은보화 및 온갖 재물, 심지어 흥보의 후처도 들어 있었다(야, 제비, 너 이놈!). 흥보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놀보가 달려온다. 흥보는 놀보를 잘 맞이하여 잔칫상을 대접한다.

이후에 이어지는 스토리도 있지만 이 창극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여기서 접도록 하겠다.
 
 <흥보 마누라 이혼 소송 사건> Today's Cast

<흥보 마누라 이혼 소송 사건> Today's Cast ⓒ 안정인

 
배심원들이 자리를 잡고 나면 화면에 애니메이션 영상이 시작된다. 색깔이 바뀌고, 화면이 빙글빙글 돌다가 우산을 쓴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변한다. 화면이 사라질 즈음 바로 그림 속 우산을 든 사람이 관객석을 지나 무대 위로 올라간다. 흥보 마누라씨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질문을 던진다. "흥보 마누라씨, 이혼 소송을 한다는데 정말입니까?" 아무리 판소리 등장인물이라지만 '흥보 마누라씨'라니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흥보'는 '박흥보'인데, 왜 그의 아내는 이름도 없이 그저 '흥보 마누라'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강OO"라는 자신의 이름보다 "박흥보씨 와이프"혹은 "갑일이 엄마"로 불린다는 사실이 떠올라 숨을 죽인다. 어쨌든 흥보 마누라씨는 법정으로 들어선다.

그곳에는 변호사를 대동한 흥보가 기다리고 있다. 흥보 마누라씨는…… 혼자다. 재판관이 이유를 묻는다. 조선 천지 흥보 마누라의 변호를 맡아줄 남정네 변호사는 없고, 여자 변호사는 존재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변호하겠다고 말한다. 게다가 흥보의 변호사와 재판관은 눈을 찡긋거리며 자기들끼리 사인을 주고받는다. 이 이혼, 쉽지 않겠다는 느낌과 함께 재판이 시작된다.

이들의 가정사는 <흥보가>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감춰진 뒷이야기'가 있는 법. 흥보 마누라씨는 <흥보가>에 차마 적지 못한 이야기가 담긴 '과거 생활 동영상'을 제출한다. 배심원과 재판관은 그 증거들을 살펴본 후 이들의 이혼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어떤 결론이 날까?
 
흥보 마누라 이혼 소송 사건 인사

▲ 흥보 마누라 이혼 소송 사건 인사 ⓒ 안정인

 
판소리를 완창으로 듣는 일은 쉽지 않다. 옛날 말투인 가사를 알아듣는 일부터 어려움이 시작된다. 혹시 그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다고 하도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제비가 가져온 복 중의 하나가 '후처'라는 설정이나 열여섯의 춘향이가 이몽룡과 잠자리를 갖는 일을 현실의 시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야기란 시대를 반영한 것이니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전통'이라는 이유로 판소리에만 너무 예외를 주기는 어렵다. 좀처럼 흥이 나질 않는다.

이런 내게 이 창극은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때?"

무대 위 다섯 명의 배우 모두 좋았지만, 김율희 배우의 노래는 말 그대로 심금을 울렸다. 무대가 작게 느껴지는 다섯 명의 군무에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뮤지컬인 듯 창인 듯 귀에 쏙쏙 박힌다. <흥보전>의 기존 곡들은 알아듣기 쉽도록 자막이 제공된다. 좋다. 이런 판소리라면 언제라도 즐겨주겠다는 마음이 든다.

스포를 두 개만 하겠다. 흥보 마누라씨의 본명은 강옥진씨다.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 화사하고 아름다운 일만 펼쳐지길 바란다. 이 재판의 결과를 알려 줄 수는 없지만 곧이어 다른 재판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스포하겠다. 도대체 무엇에 관한 재판일까? 궁금한 분은 4월 19일까지 국립 정동 극장 세실을 찾으면 알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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