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의 언덕>의 스틸컷.
영화사삼순
3부작을 완성한 박 감독이 과연 정하담 배우와 함께 했던 '꽃' 연작 이후 어떤 신작을 내놓을지 궁금증이 쌓여만 갔다. 그리고 2019년 BIFF에서 신작 <바람의 언덕>을 선보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꽃 3부작'+1로 <바람의 언덕>을 논해야 할지, '<들꽃> & <스틸 플라워>' 대 '<재꽃> & <바람의 언덕>'으로 설정해야 할지 상당한 시간 생각해야 했다.
다시 겨울의 어두운 밤길 장면이 위주였지만 <바람의 언덕>은 <재꽃>의 후일담 혹은 확장된 세계관에 가까워 보였다. 초기작들이 고립된 상황 속 하담의 악전고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재꽃>은 하담이 해금을 만나고 겪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범위가 넓어졌다. <바람의 언덕>은 본격적으로 엄마와 딸 (그리고 의붓아들까지) 버디무비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1명에서 2명으로 늘다니!
<바람의 언덕>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 구조다. 남편과 사별한 영분이 강원도 고향으로 돌아온다. 우연히 어릴 적 버린 딸을 만난다. 엄마임을 속인 채 딸의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한다. 우연한 계기로 모녀 관계가 드러난다. 상속 문제로 의붓아들이 찾아온다. 딸을 두고 떠난다. 그리고 다시 재회한다. 아침 드라마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와 소재 중심의 전개가 아니다. 다양한 이미지와 편집을 통한 연상 효과, 개별 영화가 아니라 '작가'로서 특정 감독의 영화 세계를 함께 호흡하면서 얻게 되는 세계관과 배경 정보로 지층처럼 쌓여가는 <바람의 언덕>의 독특한 영화적 세계는 흔히 생각하는 사회적 맥락의 독립영화라기보다는 작가주의 예술영화에 가까운 경지로 다가온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가 선 그어지듯 뚝딱 구분되지는 않는다. 이들 영화는 공통적으로 상업영화의 최우선 덕목이라 할 '상품'으로서의 고려보다는 영화를 통해 사회적 발언이나 예술적 성취를 중시하면서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작업해 자본의 영향을 최소화하려 노력하는 경향을 띤다.
그중 한국 독립영화가 사회비판적 측면을 강조하며 소재나 표현 수위를 통해 '개입'하는 형태라면, 주로 서구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예술영화 거장들의 방식은 공적 지원을 얼마간 받으며 소수 정예 스태프와 친숙한 배우들과 함께 감독 본인의 자의식과 주제에 최대한 집중하는 식이다. 박석영 감독의 작품세계는 <바람의 언덕>에 이르러 완연히 후자의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물론 당대 한국 독립영화에서 사회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기조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독립'영화의 기본적인 인식이나 상업 영화에 비해 강점으로 인정되는 측면에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기본 요소로 작동한다.
반면 박석영 감독의 작품은 초기작부터 소재로서 사회적 이슈를 다루더라도 그 전개와 결론에서 체제 구조보다는 개별적인 '인간'에 주목해왔다. 근작으로 향할수록 더욱 더 개인의 삶과 판단의 윤리적 측면으로 강조점이 기울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상업 영화가 주는 정교한 '가짜 현실' 속 개인을 묘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니다. 개인의 선택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윤리적 고민을 다루는 작가주의 영화에 가까운 모양새다. 미니멀리즘에 가깝게 소규모로 압축된 영화 속 현실은 복잡한 세상의 사정을 간결하지만 선명하게 대비하며 개인의 실존을 전달한다.
흔히 독립영화의 선입견을 갖게 되는 이야기 구조와도 다르고, 상업영화의 단순명쾌한 전개와도 다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 휘발되지 않고 오히려 두고두고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상징과 암시, 반복되거나 대조되는 편집의 묘를 살린 인상들로 직조된 구조 등은 (독립영화에 대한) 약간의 진입 턱을 넘어서려는 관객들에겐 영화적 쾌감과 함께 성찰을 제공해줄 것이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모험
▲<바람의 언덕>의 대구 상영회 포스터. 영화사삼순
<바람의 언덕>은 2019년 후반 BIFF와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후 독특한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형태로 통상적인 극장 개봉이 아니라 마치 유랑극단의 순회공연에 가까운 식이다. 이는 박석영 감독의 지난 극장 개봉 경험에서 쌓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결단이다.
독립영화가 극장에 걸리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거친다. 일단 전체 독립영화의 10%에 미치지 못하는 장편 독립영화는 개봉까지 비용과 품이 많이 들어간다. 상업적 개봉을 통해 손익을 맞추기 어려우므로 공적 자금 지원에 크게 의존한다.
국내외 영화제 등의 쇼케이스 행사에서 주목받고, 수상실적을 내고, 개봉지원에 선정되고, 영화 배급사와 만난 이후 개봉 과정에 돌입한다. 그 과정에서 홍보와 마케팅 등 영화 제작에 들어간 자금의 1/3 가까이가 추가로 투입돼야 한다. 하지만 애초 손익분기점을 넘길 전망이 희박한 독립영화들이 이 조건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개봉하더라도 100여 개 미만, 심하게는 두 자릿수 상영관을 겨우 확보하는 현재의 멀티플렉스 극장 환경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작품은 손에 꼽는다. 독립영화의 소규모 팬덤을 위한 굿즈와 GV(관객과의 대화)에 들어가는 수고 또한 만만치 않다. 하다못해 영화 유튜버 바이럴 마케팅에도 상응하는 비용이 지출돼야 하는 현실에서 본전을 뽑을 가망이 없어 홍보를 못 하고 홍보를 못 하니 관객이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3편의 전작들을 모두 개봉하는 성과를 낸 감독이지만, 박 감독은 특히 <재꽃> 개봉 당시 전국의 관객들과 대화를 진행해 본 판단으로 '어차피 돈 벌기는 글렀으니 기존의 방식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즐겁게 관객과 만날 순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으로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를 기획했다고 한다.
전국 곳곳에 외로운 섬처럼 흩어져 있는 독립예술영화전용관 및 지역별로 산재한 다양한 유형의 상영 집단들과 제휴해 반드시 관객과의 대화나 여러 부대행사를 전제한 소규모 상영을 매주 이어나간다는 감독의 계획은, 유랑극단의 전국 순회공연에 가까워 보인다.
반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예정된 '로드쇼' 이후 소규모로 전통적 방식의 개봉 계획도 열어두고 있지만, <바람의 언덕>이 관객과 만날 주된 방법은 우리 동네에 유랑극단이 언제 오느냐 기다리거나 그 공연을 직접 유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익을 포기한다면 원래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픈 주제와 이야기를 좀 더 전면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감독의 판단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의 방법론이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유사한 방법으로 과거나 현재까지 독특한 방식의 변칙 개봉이나 공동체 상영이 이어지고 있지만, 박석영 감독의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는 그런 다양한 시도의 집대성에 가깝다.
<바람의 언덕>은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해 오래 손발을 맞춰온 배우, 스태프와 함께 자주적인 재원 마련과 치밀한 사전 기획을 통해 효율적인 제작, 그리고 영화를 관객과 만나게 하는 개봉방식의 독립성을 지닌다. 그래서 소재로만 사회적 의제를 활용하거나 자유분방한 형식과 주제에도 불구하고 상업 영화로 가기 전 단계로 인식되는 독립예술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특히나 박석영 감독이 수차례 언급한 것처럼 감독의 어머니가 볼 수 있는 영화를 지향해 완성한 <바람의 언덕>은 지적인 젊은 영화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진한' 이야기를 체험하고픈 이들이라면 만족할 수 있는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첨단에 있는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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