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할머니의 운전면허 도전기>
여성인권영화제
나는 의심한다한편, 나는 의심한다. 나도 남도 불편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주인공이야 제 삶을 사는 것이니 주인공에게는 딴죽을 걸지 않는다. 하지만 구태여 그 주인공들을 선택한 감독의 시선과 혹은 관객의 느낌을 의심한다.
두 영화는 캐나다의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 빈곤하지 않음, 상대적으로 건강함 등의 정체성을 가진 여성노인의 아흔 근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다큐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노인 중 왜 그런 정체성을 선택했는지, 감독의 경험과 사유의 한계 혹은 게으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에서 그 정체성의 상대편에 있는 여성들의 아흔 살 삶이 어떨지를 상상해본다. 불행이나 비참 등을 상상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비주류 여성노인들에게서 예상되는 고군분투를 통해 더 다양하고 첨예한 의제들을 다루는 것이 더 좋은 다큐라는 내 소신에서 하는 말이다.
명확한 논점을 위해, 내가 만난 우리 사회 아흔 근처 여성노인들에게 돌아와, 그녀들의 일상과 그녀들에 대한 주변 덜 늙은 사람들의 태도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구술생애사 작업을 위해 내가 요즘 만나고 있는 대구 달성군 우록리 산골마을의 8090세대 여성노인들 이야기다.
그녀들은 올해도 농사를 짓고 있다. 1월에 만날 때는 '이젠 허리가 곯아서 농사는 끝'이라던 양반들이, 3월에 가니 농기구들을 챙겨 밭을 예쁘게 갈고 있었고, 8월에 가니 가뭄과 폭우에도 불구하고 젊어 하던 대로 풍성하고 깔끔하게 콩과 호박과 고추와 상추와 배추 등을 키우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구릿빛 얼굴, 지팡이를 짚어도 꼬부라진 허리와 무릎, 문맹, 뒤틀린 손가락과 몸의 상처들, 거친 말투와 모난 성격에 담긴 몸 고생과 속앓이. 열 살 근처부터 시작한 농사일이니, 경력 칠팔십년의 농사 전문가들이다. 젊은 것들은 '병원비도 안 나오니 제발 그만두라'고 타박하지만, 그녀들 말로 '눈만 뜨면 해온 일이고 눈이 안 떠져야 끝나는' 일인 그야말로 일상의 노동이다. 평생의 자립이자 자긍이었고, 아흔에도 이어지는 자기 결정이며, 젊은 것들과 세상에 대한 자기 증명이다. "우리 죽으면 이런 농사는 이제 끝이야."
새벽이든 대낮이든 도시에서 재활용품을 줍는 여남 노인들의 노동과 욕망 역시 마찬가지다. 혹 다른 선택이 없는 징그러운 고생이라면 더더욱, 우리의 태도는 동정이나 자기불안이 아닌 존중이어야 한다. 이웃으로서 할 일은 구체적 말과 손길이며, 다큐 감독과 관객으로서 할 일이라면 카메라를 통한 정치적 실천이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할머니의 운전면허 도전기>여성인권영화제
어떤 노동과 욕망에는 박수를 치고 다른 것에는 슬픔이니 우울 따위의 이모티콘만 불이고 마는 타성에 동의할 수 없고, 그 근거를 의심한다. '기껏해야 하루 몇 천원이나 번다고?'라는 타산은,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처지와 '몇 천원'의 돈과 보람, 그리고 그 인생에 대한 멸시와 혐오다. 각자의 속으로 들어가자면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 하는데...' 라는 자기 불안이다.
우리 사회 가난한 노인들을 보며 심난하던 마음이 캐나다의 중산층 백인 여성노인들에 관한 영화로 좀 즐거워졌거나 부러워졌다면, 그건 기껏해야 건강함과 돈맛과 아름다움에 관한 신자유주의의 맹렬한 광고에 세뇌된 소비자의 선망이며, 보여주는 대로만 느끼는 노예 관객의 게으른 사유다. 고난을 견디며 살아낸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힘이 만들어져 있다. 혹 다큐 작업이 희망을 캐어내는 거라면, 고난을 견딘 힘 말고 어디에서 희망을 깰 수 있다는 것인가.
캐나다나 한국이나 진정으로 아름답고 강한 할머니들은 많다. 나는 다른 시선의 다른 영화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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