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짐을 지고 오제 나뭇길을 걷고 있는 이시타카씨 팔장을 낀 채 아래를 보며 걷는 그의 모습이 구도자의 길을 걷는 수도승처럼 보인다.

▲ 짐을 지고 오제 나뭇길을 걷고 있는 이시타카씨 팔장을 낀 채 아래를 보며 걷는 그의 모습이 구도자의 길을 걷는 수도승처럼 보인다. ⓒ EBS


길 위에는 저마다 다른 무게의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배낭을 짊어진 등산객부터 블록박스처럼 쌓인 짐을 실어 나르는 봇카까지. 봇카는 일본의 옛 직업으로 걸어서 짐을 운반하는 사람이다. 현재 '오제습원' 말고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 군마현을 비롯해 4개의 현에 걸쳐있는 오제습원은 해발 1500미터 혼슈 최대의 고층습원이다. 약 1만 년 전 화산폭발로 인해 흘러내린 용암이 강을 막으면서 산허리를 따라 생긴 습지다. 10월 말부터 시작되는 오제의 겨울은 4월이 되어서야 끝난다. 4월이 되면 오제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진다.

생태보호구역인 오제는 폭이 50cm 정도 되는 나뭇길로 이어져 있어 차가 다니지 못한다. 오제에는 관광객을 위한 산장 열 곳이 운영 중이다. 헬기가 격주로 한 차례 오가지만, 주로 연료와 분뇨를 운반한다. 산장에서 필요한 식자재는 주로 봇카의 몫이다.

해발 1500미터, 식자재를 나르는 봇카들

오제의 산장으로 짐을 실어 나르는 봇카들은 총 여섯 명이다. 지게에 싣는 짐의 무게는 40kg에서 100kg을 넘나든다. 산장까지의 거리는 3.3km에서 12km까지 이른다. 산장에서 짐의 무게를 확인한 후 운반비용을 계산한 영수증을 받는다. 거리가 멀수록 값은 높아진다. 1kg당 우리 돈으로 천 원부터 이천 원까지 받는다.

지게에 짐을 실을 때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크기와 무게가 다른 상자들을 균형 있게 자리를 잡는 게 중요하다. 짐을 나르는 원동력은 힘이 아니라 균형이다. 균형을 잡지 못하면 무게 중심이 깨져 그만큼 힘이 든다. 짐을 짊어지기 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온다.

이가라시 히로야키(39)씨는 경력 19년 차 베테랑 봇카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해서 이 일에 뛰어들었다. 길 위에서 그는 중심을 생각하면서 걷는다. 막연한 동경심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떤 사명감까지 느낀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전해주는 봇카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지난 세월 차곡차곡 쌓인 발걸음이 그에게 가르쳐준 삶의 진실이었다. 

매일 같은 길을 걷지만, 풍경은 시시때때로 달라진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야생화와 풀밭 위를 거니는 새떼들, 짐의 무게에 짓눌리는 어깨 위를 스쳐가는 바람결마저도 어제와는 다른 느낌을 선사해준다. 한 줄 한 줄 어려운 문장을 읽어가듯, 길을 따라 가다보면 뚜렷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균형 잡힌 걸음이 완성해 놓은 아름다운 문장이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길은 한 걸음에서 시작되고, 한 걸음으로 완성된다. 

선배는 후배의 뒤를 따라 걷는 봇카의 전통 봇카 2년 차 하기와라씨의 뒤를 따라, 4년 차 선배인 이시타카씨가 걷고 있다.

▲ 선배는 후배의 뒤를 따라 걷는 봇카의 전통 봇카 2년 차 하기와라씨의 뒤를 따라, 4년 차 선배인 이시타카씨가 걷고 있다. ⓒ EBS


선배는 후배의 뒤를 따라 걷는다

이가라시씨에게 오제의 길은 더 특별하다. 그곳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아내 역시 봇카였다. 2006년부터 2년 동안 함께 길을 걸었다. 아내는 무엇보다 남편의 고통을 잘 안다. 한 걸음 내딛는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짐의 무게에 휘청거려보았던 같은 짐꾼이라서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남편의 권유로 그만 두었지만, 매일 위험한 일을 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시타카 스기모토(28)씨는 올해로 4년 차에 접어든 봇카다. 한때 젊은 객기로 방황했지만, 지금은 오제의 나뭇길처럼 반듯한 삶을 살고 싶다. 계단을 내려설 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빨라진다. 등산객과 함께 걷는 이 길 위에서 제 페이스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봇카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전통이 전해진다. 선배는 후배의 뒤를 따라 걷는다. 낮 12시까지 산장에 도착해야 하지만, 선배는 후배의 안전을 살펴준다. 일을 계속하려면 모두가 함께 짐을 안전하게 날라야 한다. 오제의 길은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좁은 길이지만, 함께 걷기에 좋은 외길이다. 누군가 내 뒤를 지켜주는 따뜻한 시선을 느끼며 걷는 길, 바로 봇카의 길이다.

이사타카씨는 하기와라 마사토(23)씨의 뒤를 따라 걷는다. 2년 차에 접어든 하기와라씨는 그런 선배가 있어 든든하다. 아직 신참이지만, 싫증 잘 내는 자신이 같은 길을 매일 걷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일주일에 한 번 쉬는 월요일, 하기와라씨가 새로운 지게를 만든다. 지게가 없으면 짐을 나를 수 없다. 지금 지는 지게 말고 여분의 지게를 만들어둬야 한다.

하기와라씨는 지게의 등받이를 고심하다 집 안에 계신 할아버지를 부른다. 할아버지가 등받이 부분의 매듭짓는 방법을 알려준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할아버지는 30년 경력의 봇카였다. 길 위의 인생을 되물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손자의 의지가 강해 승낙을 하고야 말았다. 몸을 움직일 때에만 길이 열린다. 정직한 한 걸음이 모여 길 위의 삶을 이어간다. 할아버지는 오세의 길을 따라 걷는 봇카의 고된 여정이 삶의 단단한 근육이 되어줄 것을 믿는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경력이 많은 이가라시씨가 바람을 피해 잠시 쉬어가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있다.

▲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경력이 많은 이가라시씨가 바람을 피해 잠시 쉬어가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있다. ⓒ EBS


짐을 짊어지는 원초적 노동, 널리 전파하고 파

이사타카씨는 봇카의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 "일본 청년 봇카대"를 구상 중이다. 홍보 작업으로 봇카 배지와 스티커를 제작해 놓았다. 오제 말고도 봇카의 쓰임새가 필요한 지역이 있을 것이다. 편리한 운송수단에 밀려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봇카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에서다. 짐을 짊어지는 원초적인 노동이 전해주는 뜨거운 땀방울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날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앞뒤로 부는 바람은 괜찮지만, 측면에서 부는 바람은 몸의 중심을 흐트러뜨린다. 노련한 이가라시씨의 몸이 휘청거린다. 쌩쌩 거세지는 바람 소리에 일정한 간격의 보폭이 무너진다. 중심을 잡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왼쪽으로 쏠린 무게 중심 때문에 몸의 균형이 깨어진다. 그래도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바람이 멎기를 기다리며 잠시 쉬어갈 뿐이다. 그는 말한다.

"신념과 심지가 있다면 나 자신이 흔들리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가라시씨는 "봇카의 중심"이 곧 "삶의 중심"임을 믿는다. 봇카는 곧 인생이기 때문이다. 짐은 오로지 혼자만의 몫이다. 봇카가 걸어가는 길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봇카는 한 걸음의 보폭으로 치러내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짐을 짊어진 사람이 내세울만한 강력한 무기는 오직 일정한 속도의 한 걸음 뿐이다.

인생도 그러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짊어질 짐이 인생의 굴곡마다 태산처럼 높게 쌓여있다. 인생의 짐을 짊어질 때 봇카의 노련한 방식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균형과 중심을 잡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인생의 중심은 내 안에 있는가.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낼 신념과 심지가 아직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가. 봇카들은 말한다. 적절한 균형과 중심이 100kg의 짐을 짊어지는 근본이라고. 그래서 누구라도 봇카가 될 수 있다. 누구라도 인생 앞에 놓인 짐을 짊어질 수 있다. 누가 더 힘이 센지 경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생의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서는, 생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봇카의 중심"을 찾기만 하면 된다.

<인생을 짊어지고> EBS 다큐영화 <길 위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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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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