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나의 첫 신혼집은 보라매공원 후문 뒤편이었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내려가면 바로 보라매공원이었다. 종종 언덕을 오르내리며 공원 호숫가까지 산책을 나갔다. 호숫가를 거닐 때면 물 표면에 어른거리는 빛살에 눈길이 저절로 닿았다. 꼭 낮에 뜨는 별빛 같았다. 오랫동안 보노라면 일상에 지친 마음결이 물비늘처럼 잔잔해졌다.

인레호수의 사람들, 호수를 담은 마음결

인레호수 우쏘빠씨의 아들 삼형제 우쏘빠씨의 아들 삼형제가 호숫가에서 고기를 낚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 인레호수 우쏘빠씨의 아들 삼형제 우쏘빠씨의 아들 삼형제가 호숫가에서 고기를 낚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 EBS


풍경으로 바라보는 호수는 아름다울 테지만, 호수가 삶터인 사람들에게는 어떤 느낌일까.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호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다. 다른 세상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어떤 경계선이다.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동경 대신 비릿한 어부의 삶을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인 사람들.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인레호수는 5월 말이면 우기로 접어든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헤엄은 걸음마와도 같다. 호숫가가 놀이터인 아이들에게 배는 신나는 놀이기구다. 어려서부터 발로 노를 젓는 어른들의 흉내를 낸다. 오히려 육지로 나가면 멀미를 하는 물의 아이들. 학교 수업료가 무료지만,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치면, 물의 아이들은 다시 물로 돌아온다.

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을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기잡이. 우쏘빠(47)씨는 고기잡이배를 타고 집을 나서는 아들들을 바라본다. 첫째 쏘멘투이(24), 둘째 쏘투완(22), 셋째 땡테이(19). 중학교를 다닌 형들에 비해 막내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아들 삼형제가 배를 타고 집을 나서자, 벌써부터 저녁 해가 기다려진다. 막내에게 배를 넘기고부터 우쏘빠씨는 발이 묶였다. 꼼짝없이 들어앉아 손자를 돌본다. 창 너머로 설핏 비치는 하늘을 곁눈질하다 방긋 웃는 손자의 재롱에 잠시 걱정을 내려놓는다.

기다려본 사람만이 기다리는 마음을 안다. 이제야 우쏘빠씨는 일생을 기다려온 호숫가 아낙네들의 마음을 알 것이다. 아낙네들이라고 마냥 넋을 놓고 기다리지는 않는다. 재봉틀로 가방을 만들고, 담배를 말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뱃소리를 기다린다. 배에 달린 작은 모터 소리만으로도 우리 집 배인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있다.

불교의 나라 미얀마, 심란한 어부의 마음

배를  마중나온 우쏘빠씨네 가족들 인레호수로 어업을 하러 나가는 배가 오늘 하루도 별 탈 없기를 기원하며 마중을 나왔다.

▲ 배를 마중나온 우쏘빠씨네 가족들 인레호수로 어업을 하러 나가는 배가 오늘 하루도 별 탈 없기를 기원하며 마중을 나왔다. ⓒ EBS


미얀마는 국민 90%가 불교 신자다. 각 집마다 불단이 마련되어 있다. 아낙네들은 매일 불상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무사안녕의 하루를 빈다. 호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은혜로운 곳이지만,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한 달에 한 번 꼭 절에 간다. 미얀마의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시한다. 이승에서의 고통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이 생을 마치면 더 나은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이 있다.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술. 어른이 될 때까지 못이 박이도록 듣는 금기 사항이다. 아버지는 불교의 계율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스승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어떤 가르침보다 중요한 덕목이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써, 자식으로써 지켜야할 책임과 의무를 자식들에게 보여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호숫가에서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인레호숫가에서 "아버지는 곧 학교"다.

우쏘빠씨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볼 때마다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불교의 계율 중 첫 째인 '살생'을 매일 반복하는 직업이 어부다. 숨을 헐떡이는 물고기 앞에서 어부의 마음은 갈팡질팡 한다. 우쏘빠씨는 말한다.

"아들 세 명 다 다른 일로 바꿔줄 수 있으면 그러고 싶어요. 물고기를 죽이고 제가 살아 있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인레호숫가의 남자들은 "물고기 대신 살아가는 생의 순간들"이 한없이 감사하다. 호수가 허락해준 물고기를 팔아 살아가지만, 물고기의 파닥거림을 마음속에 새겨둔다. 저녁이 되면 잡은 물고기를 도매상에게 내다판다.  물고기를 판 돈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그랬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살림의 원칙 중 하나다. 효를 중시하는 풍습 때문이다.

고기를 잡을 때도 이들만의 전통적인 방식이 전해진다. 사람 키만 한 기다란 노를 들어 강바닥을 힘껏 내려친다. 그 모습이 뱃머리에 넙죽 엎드려 강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것 같다. 딱딱한 나무가 부드러운 물과 부딪치며 내는 파열음 '탁'과 함께 '쉬'하는 소리도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강바닥을 내리치면, 그 소리에 놀란 물고기가 미리 쳐 놓은 그물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전통 어업 방식이다.

고요한 호숫가에서 어부들이 번쩍 노를 치켜들어 내리치는 소리는 신께 올리는 감사의 기도문인지 모른다. 고기를 많이 잡고 싶은 욕심을 일깨워주는 어떤 신호일지도. 나고 자란 호수가 세상의 전부요, 호수 속에 담긴 세상만물이 한 평생 그들이 바라볼 풍경이다. 불안함과 기다림이 매일 교차하는 어부의 손끝으로 감겨든 그물에는, 그들만이 낚아 올린 진실이 걸려 있다.

먹고 산다는 것... 생은 치열하다

인레호수에서 행해지는 전통어업 방식 강바닥을 기다란 노로 두드려 미리 쳐 놓은 그물 속으로 물고기를 몰아간다.

▲ 인레호수에서 행해지는 전통어업 방식 강바닥을 기다란 노로 두드려 미리 쳐 놓은 그물 속으로 물고기를 몰아간다. ⓒ EBS


호숫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눈동자' 같은 것. 호수는 '인간이 흘린 눈물' 같은 것. 오랜 세월 동안 흘러내린 인간의 눈물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곳, 그곳이 호수이지 않을까. 저마다 고달픈 사연들을 싣고 한 척의 배가 물길을 가른다. 일찌감치 생업에 뛰어들었던 사정을 가슴에 묻어둔 채 유유히 노를 젓는다. 호수 속에 푸른 하늘이 그대로 비쳐진다. 한 발로 노를 저으며, 두 손으로 그물을 거둬들이기까지 뱃머리에서 얼마나 많은 헛발질을 했을까.

아버지 같은 형으로 살기까지, 묘민투(16)가 치러야할 방황의 시간은 길었다. 11살에 처음 아버지로부터 배를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13살부터 관광객을 태운 보트 운전수 일을 시작했다. 카메라 감독이 꿈인 동생을 위해서라면, 지도가 없는 물길 위를 수십 번이라도 달렸다. 처음 호숫가로 나섰을 때 덜컥 무서움이 앞섰다. 물 위의 길은 모두 똑같았다. 숱하게 길을 잃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길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저녁 식사가 유일한 끼니였던 하루. 학업을 중단하고 묘민투는 배의 운전대를 잡았다. 관광객이 많으면 고향친구인 땡테이와 자주 만나게 된다. 관광객을 태운 보트가 집 앞을 지날 때면, 꼭 뒤를 돌아본다. 집안에 있던 어머니가 아들이 지나가는 뱃소리를 듣고 나와 손을 흔든다. 활짝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묻는다. 보트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그가 집에 들를 때마다, 양손에 비닐봉투가 들려있다. 형을 기다리는 동생들을 위한 선물이다.

빗방울이 후드득 날린다. 예전 같지 않은 건 하늘도 마찬가지다. 한번 퍼붓기 시작하면, 지붕이며 담장이 거센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묘민투의 집 천장에서 비가 센다. 그 아래 양푼을 갖다 놓았다. 그는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할 일이 태산이다. 새 보트도 사야하고, 집 지붕도 수리해야 한다. 인레호수를 찾는 관광객이 많아지면, 그의 바람은 빨리 앞당겨질 수 있으려나.

먹고 사는 게 뭘까. 잔잔한 인레호숫가 위로 그 시절의 내가 아른거렸다. IMF와 더불어 시작된 나의 신혼일기에는 회색빛 먹구름이 자주 등장했다. 공원 호숫가로 가는 내리막길은 걸을 만 했지만,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힘에 벅찼다. 그 시절의 조바심이 추억의 그물코에 걸려들었다. 여전히 세상을 향해 어떻게 그물을 던질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난 세월동안 또렷한 사실 하나는 건졌다. 그물은 던져질 뿐이다. 물고기는 어부의 의중대로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매일 던져보는 것, 그물의 물성이었다.

인레호수의 남자들은 이 생의 고통을 통해 다음 생의 희망을 낚아보려 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는 생업이 죄를 짓는 것 같아 싫을 때도 있다. 어쩌면 부처님의 가르침도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생은 치열하다. 어느새 어부의 마음은 호수 한 가운데에 닿아 있다. 매일 일기를 쓰듯이 그물을 던지고 강바닥을 두드린다. 거친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부디 다음 생은 온전히 자유롭기를, 오늘 하루도 감사했다.

<인레호수의 아들들> EBS 다큐영화 <길 위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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