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시합을 나가기 전 연습 경기를 하는 브라이언 프랑스인 브라이언은 낯선 나라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 시합을 나가기 전 연습 경기를 하는 브라이언 프랑스인 브라이언은 낯선 나라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 EBS


사각의 좁은 링 위에서 날려야할 것은 맨주먹뿐이다. 지금 날리는 주먹이 성공의 열쇠가 될지, 실패의 함정이 될지 알 수 없다. 시합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 시합은 '스카이다이빙' 같은 것이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지만, 그 도착지점은 누구에게나 '미지의 신세계'다. 주먹과 무릎, 팔꿈치와 정강이를 날리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무에타이는 태국의 전통 격투 스포츠다. 태국이 외세의 지배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던 데는 무에타이의 역할이 컸다. 외세의 공격에 저항할 힘을 키워준 전통 무술이자 애국 무술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통무술답게 시합을 나가기 전, 특별한 의식이 치러진다. 머리에 몽콘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와이크루라는 춤을 춘다. 전통 음악에 맞춰 경기장 주변을 돌며 복을 비는 의식이다.

브라이언은 무에타이 속에서 자신을 대면했다

환타의 다부진 각오 이번 시합을 통해 환타는 자신만의 목표를 꼭 이루고 싶다.

▲ 환타의 다부진 각오 이번 시합을 통해 환타는 자신만의 목표를 꼭 이루고 싶다. ⓒ EBS


M 무에타이 스타디움에서는 특별한 빅매치가 벌어진다. 프랑스 파리에서 온 브라이언과 태국 본토박이 환타의 경기. 연이은 패배로 마지막 은퇴전이 될지도 모를 이 시합에서 브라이언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한다. 환타는 이번 시합을 이겨 부모님과 여자친구 앞에 당당히 서고 싶다. 이번 시합에 성공하면 여자친구에게 청혼할 예정이다.

브라이언은 16살 때 학교를 그만뒀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자괴감으로 괴로워할 때였다. 부모님이 헤어진 후로 새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무렵 무에타이를 배웠다. 수련한 지 1년 6개월 만에 첫 시합을 치렀다.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무작정 무에타이의 본거지인 태국으로 떠났다.

프랑스를 떠나 태국에 정착한 지 4년 차. 브라이언은 무에타이가 좋았다. 링에서 싸울 때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된다. 싸움이 시작되면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자신의 한계 지점과 그 너머로 자신을 몰아붙일 수밖에 없는 사각의 링. 시합은 나 자신과 싸우는 동시에 상대와 싸워나가는 것이다. 매번 두려움과 흥분으로 심장이 두근거리지만, '살아있음'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느낀다.

힘든 무에타이 훈련생활이지만 가족처럼 훈훈하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만의 동질감으로 서로의 마음을 격려한다. M 체육관 관장인 아담은 선수들의 식사를 직접 챙긴다. 식단을 짜고, 불 앞에서 고기를 직접 굽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수들 사생활에도 마음을 기울인다. 무에타이를 배우는 사람은 마음의 짐이 많은 사람들이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곳이 없을 때, 무에타이를 통해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다. 브라이언에게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진정한 지도자는 선수들의 실력만이 아니라  심리도 잘 살핀다. 브라이언에게 아담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환타는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무에타이 선수 '콜라'에 빗대어 지은 이름이다. 본명은 위랏 치앙크아. 그의 부모님은 농사꾼이다. 어렸을 적 집안 형편은 간신히 먹고 살 정도였다. 자연스레 같은 동네 형으로부터 무에타이를 배웠다. 8살 때 링 위에 섰다. 처음 맛본 승리의 세계는 달콤했다. 가족과 친지들의 환호성에 세상 전부를 가진 느낌이었다. 열두 살 무렵 부모님께 무에타이를 해서 받은 상금을 드렸다.

그러나 그 달콤함이 인내의 쓴 열매임을 깨닫기까지, 흘려야했던 땀방울은 남달랐다.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생각해보면 무에타이 만큼 정직한 직업도 없다. 환타는 58kg 챔피언으로 백전불패의 선수로 이름나 있다. 이번에 치를 시합은 체급을 올려 62kg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몸무게를 늘려야 한다. 시합을 앞둔 훈련은 강행군이다. 훈련만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오고, 눈물이 날 정도로 힘에 부친다. 하지만 실전은 이보다 10배는 더 힘들다.

결전의 날

이번 시합을 앞두고 브라이언은 4kg 정도를 감량해야 한다. 연습 막바지에 이르면 훈련의 강도는 더 높아지지만, 감량을 위해 먹는 양을 줄여야 한다. 한여름 무더위에 땀복을 입고 수분을 빼낸다. 긴 윗옷과 긴 바지 사이로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땀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살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살과 살을 맞대고 겨뤄야하는 치열한 링 위에 서려면 몸은 조금 더 가벼워져야한다.

결전의 그날 사각의 링 위에서 환타와 브라이언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맞서고 있다.

▲ 결전의 그날 사각의 링 위에서 환타와 브라이언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맞서고 있다. ⓒ EBS


드디어 결전의 그날이 왔다. 시합에 나서기 전, 주먹에 붕대를 감을 때가 가장 두렵다. 무엇보다 상대 선수에 대한 경의를 잊지 않는다. 이 링 위에 서기까지 어떤 어려움을 지나왔을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상대 선수는  적이 될 수 없다. 싸워야만 하는 나를 닮은 다른 누군가일 뿐이다. 삶은 나를 닮은 누군가와 끝없이 대결하는 싸움이지 않던가.

청 코너에는 브라이언, 홍 코너에는 환타. 날선 긴장감이 온 몸의 근육들을 일깨운다. 리듬감을 타고 흘러가는 스텝에 몸을 실어 상대의 약점을 노려 공격을 날린다. 킥과 펀치의 적절한 안배와 중심을 잃지 않는 스텝. 두려움과 흥분이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조화로운 힘의 균형.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이 싸움 앞에서 믿을 거라곤 그동안 수없이 단련해온 자신의 주먹과 정강이, 팔꿈치와 무릎뿐이다.

브라이언이 환타에게 주먹을 날린다. 환타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정신력이 강한 환타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경기를 바라보는 관중들 사이로 아버지와 여자 친구의 걱정스런 낯빛이 보인다. 심판이 바닥에 쓰러진 환타를 향해 카운터를 세기 시작한다. 지금 막 백전불패의 신화가 깨어지려 한다. 링 위로 코치와 스텝들이 몰려든다. 환타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앞으로의 선수 생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경기에서 일구어낸 브라이언의 승리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링 위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된 셈이다. KO패로 승리한 브라이언의 주먹은 자신의 한계를 향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겐 보여주고 싶고, 증명하고 싶은 그 무엇이 남아 있다. 오직 링 위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의 존재감 말이다.  

두렵고 사랑스러운 것, 무에타이다

그 날 이후로 환타 vs. 브라이언의 결전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에타이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브라이언은 WPMF 챔피언십 대회에서 승리해 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환타는 3라운드 접전 끝에 판정승을 얻어냈다. 링 위에서 벌어지는 엄혹한 승부의 세계. 그 곳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단지, 그 순간을 힘겹게 지나온 결과만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 무에타이는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렬하면서도 두렵고 사랑스러운 것, 바로 무에타이다. 킥과 펀치에 실려 보낸 자신의 의지가 어떤 승부의 세계로 불시착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단 하나다. 몇 천 번을 싸워도, 링 위는 여전히 두렵고 떨린다.

사각의 링 위에서 대면할 것은 상대를 향해 뻗어야 할 주먹과 방망이질 치는 심장의 두근거림 뿐. 머리에 피가 나고, 두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도 심장의 명령대로 두 다리가 버텨낸다면, 싸우겠다는 투지를 끝까지 접고 싶지 않다. 주먹이 닿는 그 지점이 허공일지, 상대의 건장한 육체일지, 혹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절대 고독 그 너머의 세계일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주먹은 앞으로 뻗어나간다.

그건 울퉁불퉁한 주먹 한 방에 거는 기대감 때문이다. 조각조각 이어진 근육에서 솟구치는 힘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싶다. 이 거친 세상 밖으로 태어난 몸을 단련하기 위해, 뛰고 구르고 매달리면서 키워낸 육신이다. 사각의 좁은 링 그 무대 위에서, 오로지 그 순간만을 위해 달려온 육신의 불꽃이 오늘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대, 보았는가. 처절한 주먹 한 방이 뻗어나가는 절절한 고독의 세계를. 링 위에서만 확인되는 육체의 존재감을.

다큐영화 <길 위의 인생> <환타 VS 브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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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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