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무대에 선 EJ EJ는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당당한 여자이고 싶다.

▲ 무대에 선 EJ EJ는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당당한 여자이고 싶다. ⓒ EBS


누군가에게 화장은 숨 쉬는 공기다. 짙은 속눈썹과 빨간 립스틱, 뽀얀 파운데이션이 만들어내는 화사한 분위기가 꼭 필요한 사람들. 화장을 마친 순간, 진짜 자기 자신이 된다. 자아란 생물학적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심리적인 자아도 있는 법이다.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별 대신 심리적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30번째 주인공으로 필리핀에 사는 EJ의 삶을 담았다. 제목은 <마닐라 레이디보이>.

EJ 살라만테의 실명은 저스틴 살라만테다. 원래 EJ는 남자였다. 마닐라 Z 코미디바에서 코미디언으로, 가수로 무대에 서는 EJ는 '레이디보이'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 옷이 훨씬 편했다. 사랑이 저절로 찾아오듯이, 성에 대한 정체성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굳이 이유를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 받아들인 아버지

공연을 마치고 화장을 지우는 부바이 세상에 무대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다. 부바이는 그곳에서 삶을 배운다.

▲ 공연을 마치고 화장을 지우는 부바이 세상에 무대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다. 부바이는 그곳에서 삶을 배운다. ⓒ EBS


그러나 가족들에게는 어떤 이유가 필요했다. 왜 여자가 되려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만한 특별한 이유.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설명하면 이해가 가능할까. EJ의 아버지 호세 살라만테는 경찰이다. 어느 날 밤, EJ는 자기 방에 없었다. 그 시간 EJ는 게이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EJ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벨트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탁탁 벨트를 내리치면서. 먼저 EJ가 숨김없이 사실을 밝혔다. 아버지는 울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네가 게이야?"

EJ는 말했다. 게이는 죄가 아니라고. 그게 진짜 '나'라고. 다음 날 EJ는 짐을 꾸려 집을 나왔다. 마닐라에 갔다. 코미디 바에서 번 돈을 모았다. 1년 뒤 고향 집을 찾았다. 여장을 한 채였다. 1년 만에 만난 아버지가 물었다.

"누구세요?"

아버지에게 짙은 화장을 한 EJ는 꼭 매춘부 같았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지금 아버지는 EJ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자든 남자든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 아버지에게 EJ는 막둥이였다.

게이로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다. 모두가 찬성하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삶은 모든 사람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민감해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다가도 문득 슬퍼질 때가 있다. 평범한 남자를 사랑하고 싶지만, 그 남자 역시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싶을 테니까. 그럴 때면 진짜 여성이 되고 싶다. 여장 남자가 아니라 타고난 천생 여자이고 싶다.

레이디보이로 살아간다면 그건 피할 수 없는 슬픔이다. 그럴 때 EJ는 자신의 직업을 떠올린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웃음을 선사하는 딴따라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사람들의 웃음으로 먹고사는 딴따라는 슬픔에 빠져들 한가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EJ 곁에는 같은 편이 수두룩하다. 코미디 바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대부분 게이다.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레이디보이, 쉬 메일 등등. 게이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EJ는 특별할 것 없는 삶을 꾸려나간다.

동료 부바이는 말한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농담이고, 코미디다. 무대로 올라온 관객이 부바이의 치마를 잡아내리는 돌발 상황이 벌어진다. 진짜 코미디언이라면 화를 낼 수 없다. 이 상황마저 웃음으로 연출해야 한다. 왁자지껄한 웃음바다를 만들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손뼉을 마주치며 크게 웃는다. 저런 웃음이라면 조금 우스꽝스러워진다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무대 뒤로 사라진 부바이는 여장 옷을 벗는다. 거울을 보며 짙은 화장을 지운다. 깊게 패인 주름이 드러난다. 무대 경험을 통해 부바이가 깨달은 진실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그런 진리를 알게 된 자신은 '행운아'라며 밝게 웃는다. 마음속에 어떤 증오도 품지 않으며, 세상의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한다. 화장기가 지워진 부바이의 얼굴은 아이처럼 해맑다.

"자신답게" 행동할 것

EJ에겐 오래된 고향 친구가 있다. 트랜스젠더인 애슐리는 편하게 장난칠 수 있는 EJ의 유일한 친구다. 3년 만에 만나지만, 어제 본 듯 익숙하다. 시장 골목에서 빵을 함께 사 먹는데, 빵을 건네주며 아저씨가 인사한다.

"잘 가요! 예쁜 아가씨들."

그 말에 활짝 웃는 EJ와 애슐리. 세상 모든 사람이 저 아저씨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가 되기 위해 살을 찢는 고통을 참아내고, 여자의 옷매무새를 닮기 위해 속옷까지 까다롭게 갖춰 입는다. 걸음걸이며, 말투, 손짓 하나까지 뼛속 깊이 여자가 되고 싶다.

트랜스젠더인 애슐리는 미용사다. 헤어진 남자 친구 사이에서 입양한 딸 아가타가 애슐리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정식 입양 절차를 밟지 않았지만, 생모가 버린 아이를 호적에 올렸다. 트랜스젠더로서 엄마가 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곁에 있는 딸 덕분에 애슐리는 온전한 여성의 삶을 살아내는 것 같아 무척 기쁘다.

EJ는 3개월 전 TV 모창대회에서 결승까지 진출했던 실력파 가수다. EJ에겐 꿈이 있다.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고, 여자에서 다시 슈퍼스타가 되는 것이다. EJ라는 이름이 박힌 앨범을 내는 것이 소원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EJ는 부지런히 움직인다.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선거운동 현장에 EJ가 나타났다. '그랜드 랠리' 공연에 동참하러 무대 위에 오른 EJ. <강남스타일>의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30여 년 전 필리핀은 민주주의 체제가 되었다. 민주화된 이후로 치러지는 가장 치열한 선거전답게 유권자들의 함성도 뜨겁다. EJ는 LGBT(성 소수자) 단체를 지지하는 빌마 산토스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빌어먹을, 저는 게이에요."라고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한다. EJ를 응원하는 환호성을 뚫고 크게 외친다.

"여러분이 누구든 자신답게 행동하세요. 어디서든 우리가 함께할 테니까요."

EJ는 특별하게 아름답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존귀한 존재가 되는지, 그 비법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으려면, 먼저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부터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EJ에겐 세상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있다. 세상이 지금보다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 분명 EJ는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100% 레이디보이'다.

EJ의 바람대로 지난 5월 바탕가스 주(州)에서는 빌마 산토스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바탄 주(州)에서는 필리핀 최초로 트랜스젠더인 제랄딘 로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성 소수자'라는 다소 무거운 꼬리표를 달아준 사회에 앞으로 그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기대해본다. 사람은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인간의 삶을 천편일률적인 통계자료의 대상쯤으로 평가절하시킬 필요가 있을까. 평균치의 삶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남자로 태어났으나 여자로 살고 싶은 EJ의 바람도 절실한 '인간의 꿈'이다.

<길 위의 인생> <마닐라 레이디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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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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