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하루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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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가 또 다시 출몰했다. 여름이면 냉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겨울에는 붕어빵장수가 자리를 잡듯이, 홍상수 영화도 관객 앞에 제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다. 때가 되었다는 듯 또 한 편 작품을 완성시킨 이 성실한 감독은 언제나처럼 제게 익숙한 배우들을 전면에 세워서는 이제까지와 같고 이제까지와는 달라진 홍상수스러움을 마음껏 뿜어내기에 이르렀다. 신작 <우리의 하루> 이야기다.
 
홍상수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무엇이 될까. 언젠가 영화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이를 주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창동과 김기덕, 봉준호와 최동훈, 수많은 감독들의 이야기가 나온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의 평가가 가장 크게 엇갈렸던 이가 바로 홍상수였다.

누군가는 남녀상열지사를 적나라하게 찍어낼 뿐이 아니냐 했고, 다른 누구는 스스로를 드러내길 꺼리지 않는 자신감이며 용기가 대단하다 했다. 엇갈리는 욕구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유효하다 하는 이가 있었고, 또 누군가는 그저 끝없이 스스로에게 솔직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평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중 무엇이 답에 가까운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감독 홍상수는 마지막 이의 답을 가장 흡족해 할 것이 틀림없다.

작품을 거듭할수록 저와 영화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듯한 모습이 두드러지는 홍상수다. 이제는 저 자신을 그대로 투영했다 해도 틀리지 않을 시인이 등장하고,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갓 중년이 된 여배우 또한 등장한다. 서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처럼 오고가는 가운데,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는 연결된 듯 때로는 분리된 듯이 서로의 고민을 슬며시 내비친다.
  
우리의 하루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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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와 김민희,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
 
배우로 활동하다 일을 그만둔 지원(김민희 분)은 가까운 언니(송선미 분) 집에 얹혀 산다. 어느 날 지원 앞에 그녀의 외사촌(박미소 분)이 찾아온다. 외사촌이라고는 해도 평소 거의 연락을 않고 사는 먼 친척이다. 브라질에서 사왔다는 선물을 지원과 그녀의 동거인 앞에 풀어놓은 사촌동생은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어색하게 풀어놓는다. 말인즉슨, 한때 제법 잘 나가는 배우였던 지원에게 조언을 구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다.
 
지원은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지만, 무어라 이야기해야 좋을지 감이 서지 않는다. 심지어는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에게 제대로 가 닿지 않는 느낌까지 받는다.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해지는 기묘한 상황 가운데서 지원을 넘어 배우 김민희의 어제와 오늘, 그를 둘러싼 고민들이 읽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생의 요구에 지원은 제가 연기를 대하던 마음가짐을 이야기한다. 삶 가운데 얻어진 경험과 그 경험으로부터 우러난 연기를 몇 마디 말로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차츰 명백해진다. 같은 말로 대화를 나누지만 지원에게서 발화된 단어가 동생이 듣는 단어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한 걸음 떨어진 관객들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몇 마디 말로 전할 수 없는 마음을, 선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생각을, 그 모두를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을, 영화가 관객 앞에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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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지 않는 듯 연결되는 기묘한 하루
 
지원이 김민희라면, 시인 홍의주(기주봉 분)는 홍상수 본인이라 해도 좋겠다. 지원이 얹혀 사는 집에 고양이가 있는 것처럼, 홍의주 시인 또한 고양이를 길렀다. 70대에 접어든 시인은 얼마 전 키우던 고양이를 잃었는데, 늙어서 자연스레 죽은 것이다. 시인은 늘그막이 되어서야 나름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의 관심은 성공이라기보다는 건강이고 순탄하며 평화로운 삶에 있는 것이다. 이혼 후 아내며 자식과 멀어진 늙은 시인은 그마저 운명인양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유명세 때문일까. 시인의 집엔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졸업작품으로 시인의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여학생(김승윤 분)이 있고, 무작정 시인에게 연락을 해서 난해한 질문을 퍼붓는 배우지망생(하설국 분)이 있다. 시인은 그들의 요구에 기꺼이 화답한다. 카메라 앞에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내보이고, 젊은이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한다.

묻는 이는 물음에 열의가 있고, 답하는 이는 답에 정성이 있지만, 이들의 대화는 좀처럼 매끄럽게 풀려나가지 않는다. 진리가 무엇이냐, 삶이 무엇이냐는 둥의 현학적인 질문이 거듭 겉돌기 때문이다. 배우지망생이 시인을 찾아 깨달음을 얻으려는 상황의 우스꽝스러움은 좀처럼 어우러지지 않는 이들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부조리적인 즐거움을 자아낸다.
 
카메라가 지원과 시인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이야기가 진척된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원은 지원대로 시인은 시인대로 관객 앞에 저를 그대로 내보인다. 지원과 시인은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둘 사이 몇 가지 공통점이 투명한 끈처럼 서로를 잇고 있는 듯도 하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지원과 키우던 고양이를 잃은 시인의 모습이, 라면국물에 고추장을 풀어먹는 취향이, 조그마한 기타를 연주하는 지원과 제 기타의 목이 부러진 뒤로 기타를 치지 않게 된 시인의 이야기가 모두 그러하다. 관객은 이 모호한 연결 속에서 단정할 수 없는 영화의 재미를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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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솔직한 영화가 또 있느냐고
 
<우리의 하루>의 주제를 단어 하나로 말하자면 역시 솔직함이다. 시인과 지원 모두 상대 앞에 저를 솔직히 드러내려 분투하며, 그건 그대로 세상을 향한 홍상수와 김민희의 대답인 듯도 하다. 취향부터 신변잡기적인 이야기, 일에 대한 자세, 저를 둘러싼 온갖 평가를 피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고서 차분하게 답한다.
 
왜 연기를 그만두게 되었냐는 동생의 질문에 정말 공감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써준 대사를 읊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는 지원의 답변을 극중 지원의 것으로만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을 테다. 그녀가 다른 누구의 작업을 보고서 이야말로 진짜 일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답하는 순간 관객들은 김민희가 홍상수에게 반하던 순간을 엿보는 기분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답변들은 홍상수의 것과 다르지 않다. 삶도 인생도 이렇고 저렇다는 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솔직하게 살아갈 뿐이라고, 홍상수는 꼭 시인의 말처럼 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끝에서 아내와는 이혼을 하고 딸은 아내 쪽에 붙어버렸다는 푸념 아닌 푸념 또한 시인은 한 잔 술과 함께 털어 내린다. 이쯤 되면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와 김민희가 세상을 상대로 보내는 FAQ(Frequently asked questions, 자주 묻는 질문)처럼 읽힌다. 그것도 무척 단정하고 단단한.
 
영화로 제 삶을 내보이고, 제 삶으로 영화를 찍어가는 이가 바로 홍상수다. 그는 이 시대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솔직하고 독특한 작품을 써내려가는 드물고 귀한 작가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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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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