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언제나 버겁다. 어떤 상실은 한 순간에 닥쳐오고, 또 다른 상실은 서서히 다가온다. 그중 무엇이 더 괴로운가를 따지는 건 무용한 일이다. 빠르든 늦든 모든 상실이 닥쳐오리란 것을 알 뿐이다.
어렸을 적엔 삶이 무엇을 얻어가는 과정이라 믿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다. 삶은 모든 것을 허락한 것처럼 굴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그 모두를 앗아간다. 그리하여 삶은 비정하다. T. S. 앨리엇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노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짐작한다. 만물이 태어나는 봄이란, 마침내 죽고 말 것들이 태어나는 때이므로.
나의 어머니는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다. 파킨슨이라 불리는 이 병은 그 자신에게, 또 그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해소될 길 없는 고통을 안긴다. 완치를 기대할 수 없는 질병이란 인간을 무력하게 한다. 상실의 고통을 잘게 쪼개어서는 매일 한 움큼씩 건네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어머니를 매일 조금씩 잃어간다.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이가 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건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는다. 그들 각자가 감내하고 있을 고통을 나는 멀찍이 서서 그저 짐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