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남자가 버스 좌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그 곁으로 노인이 다가온다. 남자가 이를 알아채지 못하자 다른 중년 승객이 그를 나무란다. 그러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리려다 철퍼닥 바닥에 넘어진다. 이 남자, 다리를 절뚝인다. 머쓱해 하는 중년 승객. 남자는 버스가 멀어지자 아무 일 없다는 듯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조소를 짓는다. 그는 비장애인이었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의 도입부다. 인간이 인간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의 편집이 관객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관객이 믿어야 할 주인공도 그러한 인간이라는 것을 함축적이고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오프닝 시퀀스라 할 수 있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았든, 그 의도의 크기가 얼마나 됐든 인간은 일정정도 비열함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더 어리석은 선택도 한다.
 
1년 전 일가족 살인사건을 쫓는 기자 또한 그런 어리석은 인간 중 하나일 뿐이다. 그 기자의 시선으로 일가족 살인사건의 진상을 따라잡는 취재(회고)의 형식을 취한 <우행록>은 그 인간들의 이면으로 채워진 일본사회를 냉정하고 건조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앞서 소개한 오프닝 시퀀스만으로 충분히 시선을 잡아 끌만한 미스터리 드라마였다.
 
이 데뷔작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진출했던 그가 본업(?)의 세계로 돌아왔다. 피아니스트의 세계를 그린 <벌꿀과 천둥>(2020), 일종의 SF 드라마이자 국내 미개봉작인 <아크>(2021) 등을 경유한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신작 <한 남자>는 미스터리 소설을 원작 삼아 페르소나라 불릴 만한 츠마부키 사토시가 주연을 맡은 역시나 미스터리 드라마다.
 
본업의 세계라 표현한 건 살짝 과장이지만 어떤 반가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 남자>는 강렬한 데뷔작을 통해 입증했던 일본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한층 더 깊어졌고, 원숙해졌음을 또 한 번 증명하는 수작이다. 한국의 주류 영화에서 쉬이 만나볼 수 없는 차분하고 응축된 시선과 사회적인 끊을 놓지 않으려는 결기가 인간의 정체성이란 화두에 단단히 결합돼 있다. 2시간의 상영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박복한 여자의 남편이 남편이 아니었다?
 
 영화 <한 남자> 스틸 이미지.
영화 <한 남자> 스틸 이미지.트윈플러스파트너스㈜
 
이 여자 리에(안도 사쿠라), 박복하다. 병으로 둘째를 잃었다. 설상가상 이혼까지 했다. 그런 리에게 타향살이를 하던 '다이스케'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둘은 몇 년 간 딸도 낳고 네 식구가 화목한 가정을 이뤘다. 그 평화도 잠깐, 벌목 일을 하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 그것도 4년을 살뜰히 챙기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 앞에서.
 
남편을 잃은 슬픔과 고통도 잠시, 리에는 다이스케가 다이스케가 아니라는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실종됐던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 온 남편의 형이 사진 속 다이스케가 동생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지고, 리에는 이성을 잃지 않고 이혼을 도왔던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에게 '내 진짜 남편은 누구인가'를 알아 봐 달라고 의뢰한다.
 
그러니까 <한 남자>는 다이스케가 아닌 리에의 남편으로 살았던 X(쿠보타 마사타카)가 죽으면서 진짜 사건이 시작되는 영화다. 여기서 손쉬운 추정. X는 범죄에 연루됐고, 도피 생활을 해왔으며, 신원을 도용했으니 불한당이나 다름없을 것이란 짐작은 범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실종된 동생이 돌아와 유산을 노릴까 전전긍긍하는 진짜 다이스케의 형이 그런 부류다.
 
리에는 믿을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며, 어디서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 않은 그런 순한 남자가 신분을 도용한 범죄자라니. 영화 <화차>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사채 빚에 쫓겨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며 신분을 도용한 <화차>의 여성 범죄자는 인생의 수레바퀴에 몸을 의탁해 자포가지로 나아간 처연한 신세였다. 일본 사회는 일찍이 이런 신분 도용 범죄를 '죠하츠', 즉 자발적 실종이라 부르며 문제화한 바 있다.
 
비슷한 소재를 취한 <한 남자>는 범죄물이 아닌 미스터리 드라마로 풀어간다. 이미 X는 죽고 없다. 범죄가 현재 진행형일 수 없다. 리에도 아이들을 다독이고 마음을 추스르며 변호사 키도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우행록>이 기자의 시선을 쫓았듯 <한 남자> 역시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하는 키도의 관점을 의탁한다.
 
키도가 재일조선인 3세라는 일본영화에서 흔치 않은 설정은 그 자체로 무게감을 더할 수밖에 없다. X가 누구인지 묻는 키도의 조사와 <한 남자>의 서사는 갈수록 '나를 나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비범하고 철학적인 고찰로 나아간다.
 
키도는 자발적으로 실종되면서까지 신분을 버리고자 했던 X의 과거를 캐면 캘수록 혼란스러워진다. 권투선수로서 신인왕전 타이틀을 목전에 뒀던 X는 왜 자발적 실종을 선택했는가, 그를 옥죄고 속박했던 과거와 핏줄로부터의 진정한 도피는 가능했을까. 그리하여, 자신을 버리고 딸을 낳고 가족을 이룬 4년간은 정말 행복했을까. 그건 진짜 X였을까.
 
과하지 않은 연출과 매력적인 연기의 조화
 
 영화 <한 남자> 스틸 이미지.
영화 <한 남자> 스틸 이미지.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너, 재일조선인이지! 넌 뭘 보고 내 말을 믿는 거지? 범죄자인 나를?"
 
X의 과거를 쫓는 단서의 일환으로 교도소에서 만난 (일본 영화계의 대배우 에모라 아키라가 연기하는) 노회한 신분 도용업자는 키도를 향해 기기묘묘한 선문답에 이은 호통을 남기며 키도의 고민을 더해준다.
 
'그래. 그럼 일본인과 결혼해서까지 장인으로부터 '재일조선인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을 듣는 나는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 조선인인가. 나는 왜 키도의 자발적 실종에 매혹되는가. 나 말고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아내는 내가 누구인지 알까.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대로 행복한 건가.'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고 일본서점대상 최종 후보에 오른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동명 소설 원작으로 한 <한 남자>의 탁월함은 키노가 언행으로 옮길 만한 이러한 내적 질문들을 영화적이고 유려한 화법으로 치환해낸 데 기인한다.
 
키도의 고뇌와 내적 변화는 아내의 불륜을 알아채고도 말을 아끼고 미소를 지을 때, X를 조사하는 키도의 뒷모습을 고속 촬영으로 잡아낼 때, 수미상관으로 강조한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이 스크린에 투사될 때의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재현돼 방점이 찍힌다.
 
그러한 영화적 수사가 은근하게 영화 전편을 지배하는 재일조선인 문제와 만날 때 <한 남자>의 지평이 한 뼘 더 넓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이러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일본사회는 왜 어째서 자발적 실종자들을 양산하는 사회로 나아가는가. 그 답에 대한 단서는 X와 신분을 바꿨던 다이스케의 에피소드나 키도의 마지막 선택에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남자>의 매력적인 서사의 중심이자 일본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세 배우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데뷔부터 순수하고 청량감 있는 청년 이미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츠마부키 사토시도 이제 40대 중반이 다 됐다. 츠마부키는 <우행록>에 이어 <한 남자>에서도 사건을 쫓는 내레이터이자 그 자신도 사건의 영향을 받는 복합적인 인간의 얼굴을 무미건조하나 듯 생동감 있게 연기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작업하기 이전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였던 안도 사쿠라의 경우, 평범해 보이는 외모 안에 간직된 비범하고 강인한 여성의 내면을 결코 식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한다. 외모 자체가 표정인 츠마부키 사토시와는 정반대 편에선 연기라 할 만하다.
 
작품상 등 <한 남자>가 수상한 2023년 일본 아카데미상 8개 트로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부문은 X를 연기한 쿠보다 마사타카의 남우 조연상일 것이다. 츠마부키 사토시처럼 10대 고등학생 역할부터 다작을 통해 연기력을 찬찬히 다져온 쿠보타는 회상신에서만 존재하는 X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고뇌를 설득력 있게 연기해 몰입도를 높인다. 그야말로 놀라운 성장이다.

물론, 이 모든 공은 쉽지 않은 소설을 영상화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조율한 감독의 몫으로 돌아갈 공산이 커 보이지만 말이다.
한남자 츠마부키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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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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