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눈 뜨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망했습니다, 우리 아파트만 빼놓고.' 어느 웹소설이나 웹툰의 제목 같겠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거두절미 직진으로 밀어붙이는 설정이 딱 이렇다. 아니나 다를까 김숭늉 작가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이 원작이다. 넷플릭스 < D.P. >와 <지옥>을 제작한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작품이다.
주인공인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 부부는 황궁아파트 602호 자가 소유자다. 민성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여유 없이 살다보니 공무원이 돼 있었다. 명화는 아이도, 환자도 돌볼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간호사다. 이 둘이 세상 모르게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건물들이 죄다 무너져 내려 버렸다. 재난 그 자체다. 주위에 남은 건 이들이 살고 있는 황궁아파트 뿐이다.
자 이제 벌어질 법한, 동종 장르영화에서 친숙하게 목격해왔음직한 광경들이 연쇄적으로 펼쳐진다. 생존 본능과 패닉 사이. 공황에 빠질 법도 한데 이 아파트 주민들은 꽤나 침착하다. 물물 교환도 하고 식량도 비축하며 나름 질서 유지에 힘쓴다. 그래도 외부인의 침입은 막을 수 없다. 조직이, 대표가 필요하다. 이때 1층에서 발생한 화재를 영웅적 활약으로 막아낸 영탁(이병헌)이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그는 이제 황궁아파트 대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주민만이 살 수 있다', '주민은 의무를 다 하되 배급은 기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한다'. 바로 공동 생존의 원칙이 세워진다. 일명 '바퀴벌레'라 불리는 외부인들을 무력으로 추방시킨다. 명화가 집으로 거뒀던 모녀도 쫓겨날 운명이다. 이 모두는 아파트 주민들의 합의로 이뤄진다. 가차 없다. 내가, 내 가족이 먼저 살기 위해서다. 게다가 계절은 바깥에서 얼어 죽기 딱 좋은 한겨울이다.
보급대가, 방범대가 결성되고, 의료시스템이 갖춰지며, 배급제가 실현된다. 그렇다. 잠시 잠깐 디스토피가 아닌 유토피아가 찾아 온 듯 보인다. 바퀴벌레들은 철저히 차단했다. 그들 말로, 서울 그 어디에서도 이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을 듯 보인다. 연말 파티를 열고, 술판을 벌이고, 리더십을 인정받은 영탁이 노래 '아파트'를 불러 젖힐 때까지만 해도 이 평온이 오래 지속될 줄 알았다. 균열은 집 나갔던 혜원(박지후)이 원래 자기 집인 영탁의 옆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혜원의 귀환 이후 또 다른 불청객들이 찾아 온다.
콘크리트는 현대사회의 은유이지만 그 자체로 콘크리트 구조물인 아파트를 직유한다. 그런데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이다. 부동산 공화국이자 아파트 공화국이다. 2018년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리는 재난 상황 속 아파트 주민들의 상황은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충분하다.
그래서 이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대처는 이중성을 띤다. 일반 보편적인 인간의 생존 본능을 상징하는 동시에 아파트 공화국 구성원들의 집단 이기심을 아우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이념의 광기에 휩싸인 인간들의 끝 간 데 없는 폭력성을 연상시킨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이념은 내 아파트를, 황궁 아파트 한 동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생존본능의 광기다. 직설화법보다는 곳곳에 배치된 대사 등으로 유추할 정도이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자가나 전세 여부로, 강남인지 강북인지로, 서울인지 경기권인지, 수도권인지 비수도권인지로 계급을 나누는 부동산과 아파트 공화국의 광기를 은유를 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이때 가장 무서운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아파트를 지켜내기 위해 살인까지 마다않는 그 사람 말이다. 영화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는 다름 아닌 리더이자 아파트 대표인 영탁이다. 이 영탁을 바로 이병헌이 연기했다.
아파트 공화국을 대표하는, 이병헌입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롯데엔터테인먼트
이병헌이다. 데뷔 30년이 넘은 그 이병헌이다. 그는 서민, 사회적 약자를 연기할 때 더 진한 사람 냄새를 풍긴다. 악역을 연기할 때도 그 정도는 아닌데, 영탁은 이 두 요소를 기막히게 섞어 놨다. 전역한 군 출신에다 택시도 몰고 산전수전 다 겪은 영탁은 평범한 소시민이다. 빚에 시달리니 처자식에게 더 미안한 가장이다. 세상이 폐허가 되기 전부터 아파트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 아파트가, 그리고 우리 주민들이 선택받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복합적인 한 마디가 이 영탁이란 캐릭터를 그대로 상징한다. 이 영탁을 연기한 이병헌은 드라마를 제외한 영화만 놓고 봤을 때 근래 들어 만장일치의 평가를 끌어낼 만한 열연을 펼친다. 그만큼 영탁은 드라마틱한 동시에 다면적인 인물이고, 후반부로 갈수록 재난 상황을 이겨내고 아파트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광기로 치닫는다. 번뜩이는 이병헌의 눈빛을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일은 분명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기능한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성비 넘치는 한국영화계의 기술력은 두 말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대사로 등장하는) <드림팰리스>에 이어 또 다시 아파트 공화국을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한 부녀회장 역의 박선영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박서준이나 박보영 역시 제 역할을 다한다. 때때로 '왜?'란 물음표를 남기는 캐릭터들의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건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다.
하지만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처음 맞는 여름 '빅4' 시장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마주하는 일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잉투기>로 데뷔해 주목을 받았던 엄태화 감독의 주제를 밀어붙이는 뚝심과 이를 안정적으로 그리는 연출력은 상찬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다만,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이 예정된 디스토피아 재난 상업영화를 관객들이 얼마나 반길지는 의문이다. 여기에 더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서늘하면서도 명확한 결말이 가리키는 주제가 그 자체로 어느 정도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어쩔 수 없다. 부동산 아파트 공화국의 영화 밖 풍경은 영화 못지않은 공포 그 자체다. 갭 투자의 그늘 반대편에 자리했던 일부 아파트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절규가 아직 생생하지 않은가. 그 와중에 대통령 부인 일가의 양평 땅 아파트 개발 의혹이 정국을 강타 중이다. 부동산 아파트 공화국에 자포자기 순응하거나 열성적인 일원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영화처럼 목숨 바쳐) 강렬히 저항하거나.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안팎의 현재가 이 정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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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