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모래바람>의 한 장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기 '여자 이만기'라 불리는 씨름선수가 있다. 한때 그를 이길 상대 선수가 없었다. 올해까지 총 18시즌 째 출전하며 통산 97번 우승했다. 2016년 대한씨름협회와 통합되기 이전 전국 대회 등을 합산한 기록이다. 2006년부터 생활 체육인으로 여자씨름의 전설이 됐고, 통합 이후 엘리트 체육인이 됐어도 그 전설은 깨지기 힘들었다.
전 콜텍, 현 영동군청 소속 임수정이 그 전설의 여자씨름 선수다. 임수정은 통합 이후 본인 체급인 국화급(70kg 이하)에서 통산 21번 우승했고, 천하장사도 2009년을 시작으로 총 3번을 차지했다. 통합 이전까지 포함하면 천하장사만 통산 8회다. 불혹을 앞둔 나이 임에도 지난 6월 2023 강릉단오장사씨름대회 국화급 장사를 거머쥐었다. 전설은 전설이다. 남자씨름의 들러리라 여겨졌던 여자씨름을 견인한 장본인인 답다.
<모래바람>의 중심에도 임수정 선수가 있다. 영화는 콜텍에서 함께 샅바를 잡았던 임수정, 송송화, 최희화, 김다혜, 양윤서 다섯 선수의 5년여를 카메라에 담았는데, 전설과 같은 팀에서 뛰는 선수들의 응원과 경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구는 간판 임수정이 이끌었던 콜텍에서 은퇴를 하고 또 누구는 헤어지는 와중에도 임수정을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은 훈련 또 훈련이다. 대개 운동선수들이 그러하듯, 쉬는 와중에도 씨름 얘기에 매진하고 몸만들기에 주력한다.
씨름의 문외한이던 박재민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여자 선수들이 서로를 일으켜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남자 선수들 경기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남자씨름이 전부라 여기는 통념에 대한 반발이나 비인기종목의 설움에서 비롯된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경쟁을 넘어 여자씨름의 발전이란 공통의 목표를 향해 가는 이들의 어떤 몸에 밴 연대의식, 즉 '시스터후드(자매애)'가 그런 작은 행동에 배어 나오는 것이라고 박재민 감독은 말한다.
그런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인생의 방향마저 바꾼 이가 송송화 선수다. 여자 씨름계의 레전드인 송송화 선수는 뒤늦은 나이에 씨름에 뛰어들었고, 두각을 나타내는 와중에 엄마와 며느리로서의 삶을 병행했다. 2018년 10월 은퇴 이후에도 씨름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후배들을 위해 동분서주 중이다.
그런 장년이자 거구의 여성이 씨름을 계속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며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지을 때, 그건 두 가지 서사를 동시에 품어 안는 주요한 장면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몸과 싸워나갈 수밖에 없는 스포츠 인들의 숙명이 한 쪽의 서사요, 평생 몸담고 싶은 씨름을 그만둬야 하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여성 씨름선수의 애환이 다른 쪽 서사다.
<모래바람>의 카메라가 여자씨름 선수들의 애환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건 예정된 수순일 터. 나이가 나이인지라 명절 모임이 좌불안석인 임수정 선수 역시 육체적 한계와 싸우고 후배들과 경쟁하는 와중에 곧 당도할 예정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출 수는 없어 보인다. 송송화와 임수정이 묘하게 겹치는 지점이다.
이처럼 <모래바람>은 자매들의 연대나 젠더 이슈,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과 여러 화두를 품어 안는 동시에 임수정을 필두로 선수 개인의 고민을 자연스레 녹이며 대상에 대한 애정을 관객들에게 아낌없이 전이시킨다.
<모래바람>의 극장 개봉을 지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