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전용기 안에서 카트리나 재해 현장을 바라보는 당시 부시 대통령
AP Photo/ 연합뉴스
'우리 정부는 자기 나라보다 다른 나라를 더 걱정한다.'
최악의 더위가 닥친 2005년 8월 말, 둑이 무너져 물바다가 되어 버린 뉴올리언스의 어느 담장에 적혀있던 남 일 같지 않은 구호다. 당시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주민들은 대통령 전용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다 워싱턴으로 급하게 복귀하는 중이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고 며칠 뒤였다. 부시가 전용기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던 사진은 '올해의 사진'이 됐다.
"실시간으로 부시 대통령이 탄 에어포스원이 한마디로 뉴올리언스를 그냥 지나쳐 가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애플TV의 2022년 8부작 드라마 <재난, 그 이후> 4화는 이러한 TV뉴스 화면과 함께 바로 이 역사적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드라마의 배경은 침수로 고립돼 급기야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뉴올리언스 메모리얼 병원. 시설이 노후돼 아슬아슬 위태로운 병원 건물 옥상에서 구조 헬기를 기다리던 한 간호사는 유유자적 비행하는 대통령 전용기를 향해 손가락 욕을 날린다. 재난 앞에서 절망하는 시민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장면이었다.
당시 부시 정부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으며 이라크 전쟁에 몰두 중이었다. 반면 재해 복구엔 무능력과 안일한 대처로 일관했다. 뉴올리언스 시민들은 물론 미 전역의 비판에 직면했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느냐면 훗날 부시 행정부의 한 백악관 참모는 "부시 정부는 카트리나 사태로 인해 정치적으로 사망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그럴 만했다. 부시 대통령이 민심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휴가에서 복귀한 부시 대통령은 며칠이 지나서야 뉴올리언스를 방문했다. 안 그래도 시와 주 정부를 넘어 연방 정부의 늦장 대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던 시기였다. 대통령은 그나마 이재민들 얼굴도 마주하지 않았다. 이재민이 수용된 시설도 방문하지 않았다.
뉴올리언스 방문 전엔 연방정부의 구호가 마뜩찮다며 일종의 '유체이탈화법'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입이 화근이었다. 또 카트리나 만큼이나 많은 희생자를 낳은 원인이 된 뉴올리언스 제방 붕괴를 두고도 방송 인터뷰를 통해 "제방이 무너지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입을 놀렸다. 전문가들이 위험을 제기해왔던 사실을 깡그리 무시한 무지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카트리나 사태 희생자는 무려 1800명 넘게 발생했다. 실화를 극화한 애플TV의 <재난, 그 이후>는 미국인들을 절망과 경악, 슬픔에 빠뜨렸던 이 전무후무한 재난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역작이다. 질문은 이렇다. 국가라는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아니 전무한 재난 상황에서 인간성은 어떻게 시시각각 변모하는가. 재난 상황에 닥친 인물들의 묘사가 내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재난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우리는 남 일 같지 않은 그러한 재난 상황을, 그 상황에 닥친 인간들의 선택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판단해야 하는가.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실화다. 더군다나 의료진이 극의 주요 캐릭터들이다. 그것도 수많은 환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구체적이거나 개별적인 질문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지난해보다 더한 최악의 수해를 겪어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은 올 장마 앞에서, 반복되고 수위가 높아가는 수해 앞에서 기필코 참고하고 함께 고민해볼 만한 문제작이요 역작이다.
카트리나 사태와 이후 대응이 던지는 둔중한 질문
재난 그 이후, 병원 내에서 45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지하부터 1층까지 침수됐을지언정 병원 건물은 안전했다. 의료진은 모두 살아남았다. 허리케인 재해나 제방 붕괴와는 무관한 일로 보였다. 침수로 인한 정전을 겪으며 메모리얼 병원은 카트리나 상륙 후 5일간 고립에 가까운 수준의 극한 상황을 맞긴 했다. 그럼에도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 환자들은 왜,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됐을까.
<재난, 그 이후>는 사건을 탐사 취재한 한 의학 전문 기자의 동명 서적을 원작으로 한다. 2013년 발간된 원작은 취재 기간만 2년이 넘게 걸렸다. 그래서인지 원작을 극화한 8부작 드라마 또한 둔중한 주제 의식과 함께 카트리나 사태를 생생하고 다각도로 조명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무정부 상태를 초래한 결정자들은 빠져 있는 대신 의료진부터 환자들, 시민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세심하고 균형 있게 다룬다. 거기다 후반부엔 법의 잣대는 어디까지 가져대 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까지 가닿는다. 자연 재해를 총체적으로 그린 역작 중 역작이라 할 만하다. <파친코>가 그랬듯 애플TV가 이런 역작들에 관심도 많고 일가견이 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여다 볼까.
"이건 제3세계에나 일어나는 일이죠. 여기(미국)가 아니라요. (정부가, 국가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두는 거죠."
카트리나 상륙 나흘째, 고립된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의사 애나 포(베라 파미가)는 절망한다. 침수로 인해 이미 전력이 나간 상태다. 이메일도, 유선전화도 끊겼다. 물도, 식량도 부족하다. 전력이 없으니 위중환자들이 제일 문제다. 불행 중 다행일까. 사흘째부터 구조 헬기가 간간이 오간 덕에 신생아들은 우선 이송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200명 넘는 입원 환자들을 다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허리케인으로 인한 피해 자체는 예상보다 크진 않았다. 의료진들이나 직원들 모두 재난 대응에 힘을 모았다. 침수 사태는 예상 밖이었다. 매뉴얼에 충실하고자 해도 그 매뉴얼 자체가 부실했다. 전력이 끊긴 것이 결정타였다. 비대위를 꾸려 대응코자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고립 이후 지옥도가 펼쳐졌다. 배고픔이나 무더위와 싸우는 것도 모자라 외부 환경과 싸워야 했다. 물바다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시민들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건물 자체가 멀쩡한 병원은 내부의 열악함을 모르는 시민들이 보기에 생존을 의탁할 일종의 등대와 같았다. 그러는 사이 병원 인근에선 약탈이 벌어졌고, 불안감을 틈타 악성 루머까지 퍼졌다. 설상가상이었다.
이게 다 컨트롤타워가 부재하고 부실한 탓이었다. 시도, 주 정부도, 부시 대통령이 지휘하는 연방 정부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소방서로 몰려든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조에 나서도 지시를 내릴 사람이 없었다. 위중한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아들은 발만 동동 구르다 관이 아닌 다른 시민의 도움을 받는다.
뒤늦게 나타난 보건부 직원들은 건강한 사람부터 살리라며 배지를 사용해 환자들을 차등하고 분류하라고 지시한다. 애나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졸지에 환자들의 생사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다. 게다가 이 병원은 라이프케어라는 일종의 중증 요양 시설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다. 이 중증 환자들의 생사 여부도 이들 의료진의 몫으로 남겨진다.
결정적으로 시는 다섯째날 오후 5시까지 전원 철수 명령을 내린다. 막무가내다. 하나둘 의료진들도 병원을 빠져나가고, 남은 이들에게도 별다른 선택이 남아 있지 않아 보인다. 애나는 간호사 둘과 함께 납득하기 힘든, 그러나 조금씩 예감해왔던 비극적인 결정을 실행에 옮긴다. 애나는 의료진은 어떻게든 환자의 고통을 줄여줘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였다.
우리에게도 유효한 역사의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