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0 개척자, 박재홍30-30은 홈런과 도루 양 부문에서 모두 최고수준임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20-20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대 유니콘스
92학번의 '빅3'니, '빅4'니 하던 선수들이 이래저래 모두 빠져나가 버렸던 그해 박재홍은 실질적으로 투수와 야수를 통틀어 대졸 신인 중 최대어라고 할 수 있었다. 고교시절에는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파워와 스피드와 수비력을 겸비한 견실한 내야수였기에, 어느 면으로든 쓸모를 찾을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박재홍은 오직 고향 팀이라는 명분과 1차지명이라는 못마땅한 무기의 힘을 빌려 헐값에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프로팀의 의도에 순순히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박재홍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계약조건을 제시받아,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팀인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했다. 그렇게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잡은 현대는 아직 입단하지도 않은 그에게 최상덕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새로 창단한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히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피곤한 우여곡절 속에 박재홍은 겨울 전지훈련조차 참가하지 못했고, 그것은 더구나 기나긴 정규시즌이 요구하는 체력관리의 노하우를 가지지 못한 신인 선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진단이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감독 김재박이 박재홍에게 맡긴 임무는 공격의 첨병이었다. 3루수 자리에는 이미 거구의 3할 타자로 성장한 권준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김인호와 김성갑이 주고 받았지만 누구도 2할대 중반조차 넘기지 못했던 1번타자 자리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피드와 주루 감각만큼은 아마와 프로의 격차가 크지 않은 영역이었고, 아직 다듬어지거나 검증되지 못한 단신의 박재홍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재홍은 외야수로 전향했고, 1번 타자로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몇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점들이 드러나면서 1번 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우선 너무 공격적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박재홍은 선두타자로 나서면서도 투수가 더 많은 공을 던지게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뻔히 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작정을 했다는 듯 초구부터 풀스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삼진 수가 볼넷의 두 배를 넘길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는 신중하게 파헤쳐가며 실마리를 잡으려던 김재박 감독을 허탈하게 했고, 작전이라는 걸 써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몹쓸 1번 타자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결격사항은, 지나치게 장타력이 좋았다는 점이었다. 박재홍은 개막하자마자 안타의 절반 가까이를 장타로 연결했고, 3경기에 하나 꼴로 홈런을 날려대며 4번 타자 김경기마저 제치고 홈런랭킹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0경기쯤 소화한 뒤로는 아예 홈런 단독선두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김재박 감독은 '자동 원아웃'으로 경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선두타자의 공백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3번 타순으로 옮겨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번으로 타순을 옮긴 뒤, 탐색과 출루라는 부담감마저 벗어버린 박재홍은 미친 듯이 휘두르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68%. 높지 않은 도루 성공률이었지만 출루만 하면 무모하리만큼 달려대는 그는 확실히 상대 배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걸 넘어 질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결대로 친다'는 개념을 아예 모르는 듯, 어떤 구종 어떤 구질의 공이든 자신의 방망이로 새로운 궤적을 입력해 펜스 너머로 직격해버리는 무지막지한 타격을 선보이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타자'라는 느낌으로 투수들을 주눅들게 하곤 했다.
7월 16일, 박재홍은 한화와의 청주 원정경기에서 3회 초 이상목을 상대로 3점 홈런을 빼앗아내며 20-20을 완성했다. 신인으로서는 두 해 전 김재현에 이어 두 번째, 통산으로는 8번째였고, 그 여덟 번 중 가장 적은 경기 만에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지나친 장타력, 1번에서 3번으로 '좌천'되다
물론 내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동계훈련조차 소화하지 못한 채 치르는 프로 첫 시즌의 체력적 부담은 날씨가 더워지면서 성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장종훈의 41홈런 기록을 깨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던 페이스는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8월 들어서는 그와 함께 팀의 분위기도 눅눅하게 처지기 시작했다. '부정타격자세시비'도 부채질을 했다.
다른 타자들과는 정반대로 타석 맨 앞쪽에 서서 타격하던 그의 왼발은 종종 방망이를 휘두르며 타석 밖의 공간을 밟았다. 그것을 당시 쌍방울의 김성근 감독이 처음 지적했고 곧 이어 해태의 김응룡 감독도 가세했다.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규칙에는 '타자가 한 발 또는 양 발을 완전히 타자석 밖에 두고 타격을 했을 경우 아웃 처리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박재홍의 경우 분명히 배트가 공을 때리는 순간 한 발을 타자석 밖에 두곤 했다.
하지만 KBO는 '타격을 하기 전에 타석을 벗어나면 아웃처리하며, 타격을 하는 과정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심판이 고의성 여부를 판단해서 처리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 박재홍에게 부정타격 아웃을 선언한 심판은 없었고, 그렇게 한 고비는 넘겨졌다.
또 다른 고비는 고향 광주 팬들의 원망이었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아끼고 기다려왔던 광주 팬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특히 박재홍이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첫 시즌부터 프로야구무대를 쥐고 흔드는 것을 보면서 배신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5월 10일, 첫 광주 원정경기에 중견수로 나섰던 박재홍은 7회 말 수비 때 해태 이순철의 중전안타 타구를 잡다가 관중석에서 날아온 물병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고, 결국 더그아웃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광주 관중석에서는 종종 그에게 십 원짜리 동전이 날아들었고, 고향의 팬들에게 받는 따가운 시선과 야유는 부정타격 시비보다도 훨씬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