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롯데 자이언츠 우승의 주역, 염종석1992년 최고의 선수는 장종훈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은 것은 염종석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홈런 41개는 시즌 경기당 0.325개에 해당했고 대략 세 번 경기장에 찾으면 한 번 정도는 '장종훈의 홈런'을 구경할 수 있는 빈도였다. 90년대 초반 서울과 부산의 '빅 마켓 팀'들의 강세와 더불어 장종훈의 홈런쇼는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는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한국프로야구는 300만 시대를 넘어 400만 시대의 코앞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상대팀 응원석에서마저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저 평범한 안타로 끝나는 순간에는 이글스 팬들마저 야유를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입장료를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는 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2년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둔 채 39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장종훈은 17일에 40홈런을 날리며 송진우의 19승째를 만들어냈고, 18일에는 이강철의 19승 도전을 좌절시키는 41호 결승홈런을 날리며 다시 송진우에게 단독 다승왕 타이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칭호와 함께 2년 연속 MVP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연습생 출신의 홈런왕, 하지만 가을에 울다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6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신생팀 빙그레의 월급 40만 원짜리 연습생으로 입단한 뒤 이듬해 팀의 주전 유격수 이광길이 부상으로 이탈한 틈에 1군 무대에 올라설 수 있었던 소년.
그는 프로 유니폼을 입은 뒤 8cm나 자란 키만큼 기량도 쑥쑥 성장해 불과 4년 만에 홈런왕 타이틀을 접수했고, 1991년에는 한국프로야구 35홈런과 114타점으로 두 부문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더해 .345의 타율과 21개의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타자'로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1992년, 시즌 종료를 코앞에 두고 기어이 40홈런 벽을 넘어서며 후배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질 수 있었다.
그가 세운 41홈런의 벽은 98년에 42개를 기록한 우즈에 의해 무너졌고, 99년에 50개의 벽을 넘은데 이어 2003년에 56개까지 달려간 이승엽의 기록 뒤편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물론 1992년 이후 한국 야구의 홈런시대가 개막된 것은 아니었다. 장종훈이 불운 속에 깊은 부진의 늪에 빠졌던 1993년에는 김성래가 28개로 홈런왕이 올랐고, 그 뒤로 다시 김상호와 김기태가 25개만으로 홈런왕에 오르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장종훈이 있었기에 이승엽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장종훈의 41홈런 이후 해마다 새로운 시즌이 막을 올리고 누군가 연달아 서너 개라도 홈런포를 가동하기 시작하면 신문과 방송은 그것이 과연 1992년의 장종훈에 견주어 어느 만큼 빠르거나 느린 것인가를 가늠했고, 그런 과정에서 후배 타자들이 근육을 키우고 스윙 궤적을 다듬으며 도전하는 목표선이 됐기 때문이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터져 나온 장종훈의 홈런 두 방은 이글스 팬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은 데 이어 '눈엣가시' 해태 타이거즈의 기를 꺾는 기분 좋은 결정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 해의 우승은 3위로 올라와 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꺾은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이글스에 네 번째 준우승을 선사한 롯데 자이언츠였다. 시즌 내내 불을 뿜은 장종훈의 대포는 한국시리즈 기간 단 한 차례도 가동되지 못했고, 반면 롯데 자이언츠의 소총부대는 쉼 없이 단타와 번트와 도루의 잔공격을 퍼부어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리즈 다섯 경기에서 나온 단 두 개의 홈런은, 롯데 타선에서도 소문난 소총인 이종운과 공필성이 때려낸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 또한 홈런이 가진 역설의 한 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