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하고 독하게 영화 속의 메시지를 읽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청년의 통통 튀는 감성을 담아 표현하고 소통하겠습니다. [편집자말]
19세기 영국. 이 나라 국민들은 좀비 무리의 습격으로 고통받는다. 귀족들은 좀비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자녀들을 중국, 일본 등에 무술 유학을 보낸다. 이는 버 스티어스 감독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의 이야기이다. 영화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이 기발한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부터 이야기해 보자.

영화는 동명의 소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원작 소설인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가 탄생한 배경은 더욱 재밌다. 먼저, 작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 소설의 작가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는 기발한 작품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을 집필했고, 영화 <다크 섀도우>의 각본을 맡기도 했다.

 버 스티어스 감독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19세기 영국의 국민들이 좀비무리의 습격으로 고통받는 내용이다.

버 스티어스 감독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19세기 영국의 국민들이 좀비무리의 습격으로 고통받는 내용이다. ⓒ 라이온스 게이트, 스크린 젬스


그가 기발한 발상으로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스파이더맨을 파헤친 책인 <스파이더맨 핸드북>으로 작가세계에 입문해 공포영화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을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제를 끌만한 내용을 원했고, 오래된 고전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다. 그는 영국의 사회상이 잘 반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로맨스 소설에 좀비라는 기발한 소재를 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소설은 수백만 권이 넘게 팔리며 인기를 얻었으니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소설의 성공에 비해 영화는 다소 아쉬운 점이 많다. 영화가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하필 좀비일까?

먼저,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좀비여야 했을까'란 것이다. 보통,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중에 생겨나는 사랑의 감정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힘든 일이 많을 때는 누군가의 작은 위로도 매우 따뜻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작가 역시 <오만과 편견>의 러브 스토리에 위기라는 조미료를 더해서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 인기 많았던 좀비라는 소재를 사용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액션을 가미해 오락성까지 담보하면서 말이다.

좀비라는 소재는 당시의 작가에게는 매우 적절하게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단지 인기 많던 소재였기에 좀비를 택했다고 하기에는 영화 속의 좀비들은 다른 좀비들과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서 등장하는 좀비들은 처음부터 말은 물론, 생각까지 할 수 있단 것이다. '배고파'와 같은 단순한 말도 아니다.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사람들을 속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좀비들은 대부분 주인공 엘리자베스(릴리 제임스 분)와 알고 지내던 관계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기도 한다. 겉모습은 흉측하고 괴랄하지만 말을 하고 사람처럼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기존에 흔하게 봐왔던 좀비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두 번째, 좀비들이 먹는 것이 바로 '뇌'라는 것이다. 보통 좀비를 떠올리면 사람에게 마구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뜯어먹는 모습이 상상된다. 기존의 좀비들에게 '뇌'나, '눈' 등등 특별한 식사 취향 같은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곳의 좀비들은 뇌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사람의 뇌를 못 먹을 때는 돼지의 뇌라도 먹을 만큼 말이다.

이 영화의 좀비가 기존의 좀비와 다른 이유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말은 물론, 생각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말은 물론, 생각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 라이온스 게이트, 스크린 젬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좀비가 기존의 좀비와 다르게 묘사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영화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원작인 <오만과 편견>이 집필된 1800년대 전후의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 그 영향이 영국에도 크게 미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작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보다는 영국 지역의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때문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나 다아시(샘 라알리 분)는 당시 영국 사회의 지주계층이다. 그래서 보통의 평민들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그들의 지위로부터 오는 오만과 서로에 대한 편견 속에서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바로 <오만과 편견>이다.

영화 역시 이 플롯을 답습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 좀비라는 요소가 추가된 것이다. 좀비의 역할은 무엇일까. 좀비의 특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곳의 좀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전염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좀비 영화들이 보통, 다수의 좀비와 소수의 생존자들의 싸움을 그려냈다면 이 곳의 좀비들은 적은 숫자로 이따금씩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좀비들은 주인공들과 일면식이 있던 사람들이다. 이는 좀비가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영국 사회의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갉아먹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의 영국 사회를 부정하는 존재(영화에서는 좀비로 표현)들이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좀비들이 먹는 것은 사람들의 뇌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뇌의 의미는 무엇일까. 뇌는 지식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기존의 계층 사회를 부정하는 존재들은 계층 사회를 굳건히 지켜온 자들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대다수의 시민들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시민들은 제대로된 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삶의 투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배움보다는 일하는 법을 배우곤 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지금의 계층 사회가 부당하다는 인식을 가질 이성이 부족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식이다. 지금의 계층 사회가 부당하다는 인식,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켜야 시민들의 삶도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은 시민들이 지식을 접하면서 나오게 된다. 좀비들이 뇌를 먹는 행위 역시, 지식을 습득하고 계층 사회를 뒤엎을 명분을 얻기 위함이다.

또한, 좀비들에게는 4명의 귀족좀비라고 불리는 존재(포호스맨)와 스스로를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는 존재가 함께 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요한의 서신(요한일서 2:18, 요한이서 1:7)에서 등장하는 말인데, 특정한 개인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반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리스교도들은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존재들이 적그리스도라고 믿었고, 나폴레옹 역시 적그리스도로 칭해지기도 했다. 적그리스도로 칭해진 나폴레옹과, 자신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는 좀비들의 지도자, 이 둘이 겹쳐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닌 의도된 장치이다.

결국, 19세기 당시에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이 영국에도 많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기존의 사회를 부정하는 세력인 좀비는 바로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은 혁명세력을 모티브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기존의 사회를 지키려는 이들과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이들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기존의 원작이 영국의 지역 사회의 내용만을 집중했다면 각색된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유럽 전반적인 사회 상황을 잘 녹여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어째서 좀비가 등장하게 됐는지부터 이 영화의 좀비가 기존의 좀비와 다른 점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이제 이 영화가 왜 아쉬운 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로맨스와 좀비의 결합... 잃어버린 정체성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순한 오락성만 부여할 뿐 로맨스를 그려내지 못한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순한 오락성만 부여할 뿐 로맨스를 그려내지 못한다. ⓒ 라이온스 게이트, 스크린 젬스


우선, 좀비를 통해 당시 유럽 전반적인 시대상황을 녹여내는 시도를 한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와 그것을 발굴해 오락영화로 만들어낸 버 스티어스 감독의 생각이 기발했다는 칭찬을 하고 싶다. 분명, 오래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만들어 낸 그들은 매우 기발하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는 기발함만으로 넘기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 영화가 애매한 이유를 두 가지로 짚어볼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옅어져 버린 로맨스의 향기다. <오만과 편견>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로맨스를 그려낸 작품이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오만함에 좋지 않은 첫인상을 받고 그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다아시의 지성과 재치에 조금씩 매력을 느끼고 호감으로 바뀐다. 서로 어긋났던 두 사람이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는 내용이 바로 원작의 중요 흐름이다.

영화 역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의 플롯을 따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석연치 않다. 두 사람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다루기보다는 이따금씩 좀비가 등장하고 싸우는 장면만이 등장할 뿐이다. 다아시는 엘리자베스가 좀비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며 반하게 되고,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좀비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의 진심을 느낀다. 이는 관객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로맨스의 향기를 느끼기 어려운 수준까지 만든다.

두 번째는 애매한 좀비의 존재이다. 앞서 좀비의 역할이 무엇일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도 좀비의 존재는 애매하다. 한 사람의 잘못된 독단으로 인해 좌지우지 되고 움직이는 집단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인지, 결국은 계층 사회가 무너지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흔한 영움담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도통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등장한 순간 곧 죽어나가는 좀비들은 별로 위협적이지도 못하다. 자신의 존재 정도만 알리고 사라지는 좀비들과 무쌍하게 좀비들을 쓸어버리는 다섯 자매와 다아시의 모습. 이들의 모습은 영화에 단순한 오락성만 부여할 뿐 그들의 사랑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로맨스물인지 좀비물인지 그 정체성을 잃고 방황한다. 로맨스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내용이 부족하고, 오락물이라고 하기에는 좀비들의 위협이 턱없이 부족하다. 영화가 방향성을 놓치고 방황하다보니 관객들 역시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로맨스를 느끼지도, 좀비의 위협을 느끼지도 못하니 감독의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애매함, 그것이 <오만과 편견> 그대로일 때가 훨씬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오만과 편견>의 원작자 제인 오스틴이 이 영화를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관 속에서 뛰쳐나와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고전 오만과편견 좀비 제인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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