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하고 독하게 영화 속의 메시지를 읽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청년의 통통 튀는 감성을 담아 표현하고 소통하겠습니다. [편집자말]
어린 시절, 상어라는 존재는 공포의 존재였다. 특히 <죠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식인상어들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현실에서도 존재할 것만 같아 무서웠다. <죠스>를 시작으로 식인상어들은 매번 활약을 해왔지만 비슷한 방식이 반복되다보니 전작만 못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자움 콜렛 세라 감독이 <죠스>의 추억을 떠올리기 충분할 정도로 긴장감 있는 상어와의 사투를 <언더 워터>를 통해 선보이고 있다.

기대로 인해 증폭되는 긴장감

 감독은 바다로 향하는 낸시의 모습을 하늘에서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준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상어의 존재를 알기 때문인지 섬뜩하게 느껴진다.

감독은 바다로 향하는 낸시의 모습을 하늘에서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준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상어의 존재를 알기 때문인지 섬뜩하게 느껴진다. ⓒ 콜롬비아 픽처스


사람에게는 기대감 효과라는 것이 있다. 기대감이라는 것은 마땅히 바란대로 결과가 나오길 원하는 반응이다. 두뇌는 병렬처리를 진행하면서 여러가지 기억이나 정서를 처리하는데 여기에는 기대감도 개입한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잘못 적힌 글을 제대로 수정해서 읽어내기도 하고 기억을 왜곡하기도 한다.

<언더 워터>는 관객의 기대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는 글과 바다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상어. 포스터에 나오는 이 정보만으로 우리는 <언더 워터>가 상어와 주인공이 사투를 벌이는 영화임을 단숨에 예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상어와의 사투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를 갖고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감독은 관객들의 기대감을 충실히 이용하였다. 영화는 한 소년이 발견한 카메라를 통해 상어의 모습을 짧게 보여준 뒤에 낸시(블레이크 라이블리 분)에게 화면을 돌린다. 친절한 남자의 차를 얻어타고 이름 모를 해변가로 향하는 낸시에 대한 정보는 오로지 단편적으로만 전달된다. 미국인 여성이라는 것과 엄마가 왔었던 해변을 찾으로 왔다는 정보이지만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상어가 중하니 말이다.

관객들의 기대에 부흥하듯 낸시는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서핑에 나설 준비를 한다. 감독은 바다로 향하는 낸시의 모습을 하늘에서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준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상어의 존재를 알기 때문인지 섬뜩하게 느껴진다.

한동안은 낸시가 서핑을 즐기는 모습이 평화롭게 나온다. 하지만 틈틈히 바다 속에서 잡아내는 샷을 통해 관객은 상어의 시선을 느끼게 되고 낸시를 향해 카메라가 다가갈 수록 긴장감은 고조된다. 감독은 특별한 해설을 많이 덧붙이지도 않는다. 낸시가 대화하거나 통화하는 모습을 통해 그녀가 의대를 다녔다는 사실이나, 친구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정도만 알 수 있다. 의도적으로 낸시가 단번에 상어에게 상처를 입고 죽지 않는 이유나, 긴 시간동안 홀로 싸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정도의 필수적인 정보만 제공한 채 나머지 정보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다른 정보들에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어와 낸시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상어가 등장하고 나서의 연출도 훌륭하다. 죽은 고래나 바위 등의 물체에 의존하며 낸시는 생명을 연장하는데 여기에 감독은 시간이라는 요소를 추가시킨다. 만조가 몇시간 남았는지 관객에게 알려주므로서 낸시가 바위를 벗어나 움직여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카메라를 얻기 위해 움직이거나 다른 바위로 움직일때 스탑워치를 이용해 시간제한을 두므로서 상어와의 추격전의 스릴을 배가시킨다.

여성혐오와 메갈리아

 흔히 여성이란 존재는 남성에게 의존하거나 공포에 떨며 좌절하는 존재로 그려지고는 한다. 물론, 안젤리나 졸리 등이 출연하여 활약을 펼치는 영화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평범한 여성이라고 보기에는 특별한 무술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낸시는 평범한 의대를 다니던 여성으로서 무시무시한 식인상어와의 싸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데 의미가 있다.

흔히 여성이란 존재는 남성에게 의존하거나 공포에 떨며 좌절하는 존재로 그려지고는 한다. 물론, 안젤리나 졸리 등이 출연하여 활약을 펼치는 영화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평범한 여성이라고 보기에는 특별한 무술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낸시는 평범한 의대를 다니던 여성으로서 무시무시한 식인상어와의 싸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데 의미가 있다. ⓒ 콜롬비아 픽처스


<언더 워터>는 특이하게도 낸시라는 여성의 1인극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낸시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이다. 영화 중간에 남성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역할을 해내지 못한채 상어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는 이 영화가 여성의 사투를 중심으로 다뤘다는 것을 집중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언더 워터>에서 낸시는 상어와 엄청난 사투를 벌인다. 상어는 3명의 남성의 목숨을 빼앗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낸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든다. 낸시는 엄청난 생명력을 보이며 상어와 끝까지 사투한다.

흔히 여성이란 존재는 남성에게 의존하거나 공포에 떨며 좌절하는 존재로 그려지고는 한다. 물론, 안젤리나 졸리 등이 출연하여 활약을 펼치는 영화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평범한 여성이라고 보기에는 특별한 무술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낸시는 평범한 의대를 다니던 여성으로서 무시무시한 식인상어와의 싸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다. 초반부터 다리를 물려 엄청난 출혈을 겪기도 하고 남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외침은 닿지 않고 남성들은 떠나버린다. 결국 여성인 낸시 혼자서 무시무시한 상어와 싸우게 되고 곁에는 다친 갈매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상황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여성들의 상황과 유사하다. 여성혐오는 끊임없이 공격하는 상어처럼 지치지도 않고 여성들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다. 게다가 사용하는 사람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만큼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진 경우도 많다. 마치 바다속에서 돌아다니는 상어처럼 여성혐오는 잘 보이지 않을때도 많지만 언제든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절망적인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여성혐오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은 외침은 남자들에게 닿지 못했다. 평화롭고 착하게 표현하기에는 여성혐오는 강대했고 남자들의 심리적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결국 여성들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메갈리아라는 집단이 생겨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많은 충격을 가져왔다. 사회에 여성혐오가 무의식적이든 악의적이든 만연해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상처 입은 상어처럼 여성혐오의 주체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했다.(자신은 여성혐오를 하지 않았다는 남성들을 위해 남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메갈리아4에서 마련한 티셔츠를 후원했다는 이유로 김자연 성우는 자신의 창작물이 사용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메갈녀'가 되어 욕설을 들어야만 했다.

상처 입고 이성을 잃은 상어처럼 비정상적인 남성들의 연대는 '여성혐오'를 말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검증하고 공격하고 있다. 심지어 '메갈리아 = 메갈리아4 = 워마드 = 페미나치 = 일베 = IS'의 이야기까지 돌고 있다. '메갈리아4'가 미러링이라는 전략을 사용하지도 않고 반사회적인 게시글을 올리는 것도 아니지만 이를 공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메갈리아4'는 미러링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남성혐오 커뮤니티였으며 이전의 '메갈리아'와 다를 게 없는 사이트여야 했다. 또한, 반사회적이고 혐오만을 유포해온 일베와 성격이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메갈리아는 일베와 동일하게 분류되며 사회악으로 여겨졌다. 때로는 터무니없이 IS나 나치와 비교되기도 한다.

'메갈리아'에게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 '메갈녀'가 되어야 하고 '메갈리아'를 부정하는 전략을 사용하게 되면 결국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 등의 프레임에 갇혀야 하는 상황속에서 제대로 된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건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언더 워터>에서 느꼈던 긴장감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여성들은 현실에서 훨씬 격렬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더 워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에서 등장했던 성인남자는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바로 낸시를 해변으로 데려왔던 남자였다. 그는 너무 늦게 등장하기는 했지만 낸시를 돕기 위해 작은 노력을 하려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남자들아, 너무 늦지 않게 여성혐오에 맞서는 여성들의 옆에 서자.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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