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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오후 4시 30분. 조용하던 시골마을이,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정말 깊은 곳, 구름도 쉬어넘을 법한 곳'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법한 진안군 백운면. 새 소리만 간간이 들리던 이 마을이 잠깐 소란스러워지면 그건, 진안군 백운초등학교 학생들이 방과후 교실을 마치고, 백운면 흰구름작은도서관에 도착했다는 증거다.

진안교육협동조합에서 실시하는 엄마품교실. 이제 학생들은 이곳에서 저녁 8시30분까지 부모님이 데리러 올 때까지 엄마품교실을 시작한다. 시작이라봤자, 특별한 것은 없다. 숙제를 마친 아이들은 놀기 시작한다. 밖에서 뛰놀고, 실내에서 뒹굴고 그러다 지치면 책을 보다가 저녁을 먹는다.

1주일 1회 실시하는 탁구교실을 제외하면 딱히 이렇다 할 프로그램은 없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수업내용이 확실한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도시의 학부모들에게 이곳은 너무 이상한 곳일지도 모른다.

학교갔다오면 책가방 내던져놓고, 밖에서 하루종일 턱이 숨에 차게 놀던 시절.흰구름도서관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 시절의 아이들을 닮았다.
 학교갔다오면 책가방 내던져놓고, 밖에서 하루종일 턱이 숨에 차게 놀던 시절.흰구름도서관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 시절의 아이들을 닮았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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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없음'이 프로그램(?) 

하지만 프로그램이 없는 것이 곧 이곳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말장난이 아니다. 마땅한 놀이기구, 지도교사도 없지만 아이들은 알차게 논다.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와 함성소리가 잘 증명해준다. 정말 '흰구름'처럼 자유롭게 논다. 정해진 모둠같은 것도 없다. 그냥 마음맞는 아이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는 반복하며 놀이를 재생산하고 창조한다.

방과후나 학원이 없었던 멀지않던 그 옛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마루에 책가방 내던지고 동네 아이들과 온종일 골목에서 쌕쌕거리며 놀던 그 모습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그 당시,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아이들은 턱이 숨에 찰 때까지 놀았다. 놀면서 배웠다.

새로운 놀이를 만들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 서로 한발짝 양보하기도 하고, 동생을 돌보기도 하고, 언니오빠한테 물어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배웠다. 이렇듯 우리의 옛 공동체 안에는 놀이와 배움이 있었다. 진안군 백운면 흰구름도서관에서는 우리가 잊고있던 옛날 그 공동체가 살아나고 있었다. 

놀이와 배움 있는 '공동체'

이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색종이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친구 승백이와 기찬이 형제에게 줄 편지다. 승백이 형제는 다음날이면 부모님을 따라 튀니지로 떠난다. 그 새 정이 들었다고 몇몇 아이들은 편지를 건네주며 울었다. 아이들은 작별인사를 나누며 서로 아쉬워했다. 그러다 누가 먼저였을까.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 같이 놀기 시작했다. 승백이 형제도 땀을 흘리며 놀았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증거다.

승백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책만 들여다보는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아이들과 어울릴 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과 노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날도 승백이는 친구들과 뒹굴며 깔깔댔다. 왜 책을 읽지 않느냐는 질문에 승백이는 '노는게 더 재밌으니까요'라고 답했다. 

책밖에 몰랐던 책벌레 승백이(오른쪽)는 엄마품돌봄교실을 통해 친구들과 재밌게 어울리는 법을 배웠다. 이 두 형제는 촬영 다음날 튀니지로 떠났다.
 책밖에 몰랐던 책벌레 승백이(오른쪽)는 엄마품돌봄교실을 통해 친구들과 재밌게 어울리는 법을 배웠다. 이 두 형제는 촬영 다음날 튀니지로 떠났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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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한 차례 뛰어놀던 아이들은 도서관에 들어와 다시 놀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카드 놀이를 하고, 몇몇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했다. 책을 펼쳐드는 아이도 있다. 다른 작은도서관에 비해 장서를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이곳에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누구 한 명 강요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 나름의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조바심내지 않고, 그저 그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면 된다.

온 몸의 에너지를 다 소모하면서 놀다보니, 저녁밥도 자연히 맛있다. 부모가 맞벌이인 자녀들의 경우, 집에 가도 간식이나 식사를 혼자 해결해야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친구들과 선생님 모두 한 '식구'다. 밥도 나누어먹고, 함께 놀고 성장한다. 

아이들은 엄마품돌봄교실에 오면 자유롭게 뛰논다
 아이들은 엄마품돌봄교실에 오면 자유롭게 뛰논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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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잊은 듯, 유유자적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 길을 잘못 들었다고, 빨리가라고, 누구 하나 채근하지 않아도 구름은 제 갈길 잘 간다. 구름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구름을 닮아 있었다. 

"예전엔 학원비 내던 생활의 연속...지금은?"
[인터뷰] 마을학교 다니는 하진이의 엄마, 이은숙씨 
이은숙씨는 퇴근후 엄마품돌봄교실에서 하진이를 데리고 퇴근한다. 요즘 함께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저녁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으며 저녁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풍요로운 삶이다.
 이은숙씨는 퇴근후 엄마품돌봄교실에서 하진이를 데리고 퇴근한다. 요즘 함께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저녁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으며 저녁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풍요로운 삶이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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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이은숙(44)씨는 셋째 하진이(백운초등학교 4) 때문에 2년간 휴직해야했다. 큰애와 둘째는 시어머니가 키워줬지만, 하진이는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외숙모가 잠시 맡아주었지만 그것도 여의치않아 하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2년 동안 은숙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하진이를 돌봐야했다. 당시는 전주에서 생활했다. 문제는 하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은숙씨가 진안으로 직장에 복귀하면서부터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하진이가 적응을 잘 못하더라구요. 제가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아무래도 신경을 잘 못쓰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제가 다니는 직장 근처로 집을 옮겼어요."

진안으로 이사온 뒤, 은숙씨는 진안교육협동조합의 마을학교를 알게 됐다. 수업시간이 끝나면 하진이는 자연스레 엄마품돌봄교실에 참여하게 됐다. 무엇인가를 반복하는 것을 힘겨워하던 하진이는 갈수록 '시골스러워'졌고, 단순해졌다.

하진이의 변화는 은숙씨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예전에는 늘 걱정이 많았죠. 공부 못 하면 어떡하나, 왕따 당하면 어떡하나...그런데 시골에 와서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어요. 시골에는 정말 왕따가 없어요. 불필요한 경쟁도 없죠."

엄마품 돌봄교실에서 숙제는 물론, 저녁식사까지 다 마치고 온 하진이는 은숙씨와 함께 책을 읽는다든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등 좀 더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게 됐다. 분명 예전과는 다른 생활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돈 벌어서 학원비만 꼬박꼬박 내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은숙씨가 마을학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공동체가 무엇인지 하진이가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어요. 예전에 도시에 살 때는 학교 다녀온 뒤 학원에 다녀와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친구라는 것이 무엇이고, 함께 어울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된 것 같아 무척 기쁩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도 친구들과 어울리고싶어,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하진이 때문에 도리어 은숙씨가 하진이를 기다리는 일이 더 많단다.

은숙씨는 진안교육협동조합의 조합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협동조합의 힘에 대해 깨닫게 됐다. 하진이가 변했듯, 많은 자녀들이 이 즐거운 변화에 기꺼이 동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북도 교육청 교육뉴스인 <행복한 교육>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진안교육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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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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