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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인다. 피곤하고 지쳐서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한 줌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 아마 대부분은 이렇게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번아웃의 종말>에 의하면 그것은 번아웃이 아니다. 그저 극도로 피곤하고 지친 상태이다. 그렇다면 피곤함과 번아웃은 어떻게 다른가.

몇 년 전, 나 역시 번아웃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큰일을 끝내고 난 뒤의 뿌듯함과 허전함이 묘하게 뒤섞인 기분이었다. 게다가 신체적인 피로까지 더해서 이게 번아웃이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로 인해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거나, 인간과 세계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러면 엄밀히 말해 번아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말하자면 번아웃은 그런 것이다. 나 자신 존엄의 가치를 상실하고 촉이 나간 전구처럼 소진되어 깜깜해진 상태. 그리고 이 세상과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며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상태.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가.
  
<번아웃의 종말>
 <번아웃의 종말>
ⓒ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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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의 종말>의 지은이는 ""내가 나의 번아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당신의 번아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번아웃이 늘 과중한 업무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업무량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거나 스스로 통제권을 가지지 못한다면 또는 우리가 하는 일이 개인적인 가치와 상충한다면 여전히 번아웃 스펙트럼에 안착할 가능성이 있다." (p.140)
 
번아웃을 '처방'하는 방법과 제안들은 많다. 잠자는 시간을 늘려라, 거절하는 법을 배워라, 작업을 급한 것과 중요한 것 순서로 정리해라, 명상해라... 등등. 지금도 유튜브를 비롯해서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콘텐츠들은 어떻게 하면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들로 넘쳐난다.

이 책의 작가는 그런 것은 '근본적으로는 미신'이라고 한다. 번아웃에는 개인적 구성 방법론보다는 일터의 문화적 이상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번아웃을 일으키는 데는 '일'과 '직업'에 대한 '환상'이 더 큰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일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사회

우리는 어려서부터 '일'에 대한 이야기를 무수히 들으며 자랐다. '커서 뭐가 될래?' '네 직업은 뭐니?' '무슨 직업을 갖고 싶니?' '무슨 일을 하고 싶어?' 등등. 마치 '일'만이 나를 증명하고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행위처럼 암묵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마치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무능력한 사람,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일은 나의 미래를 보장하고 성공을 장담하는 사다리이자 나를 보여주는 존재가치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직업의식'일뿐이다.
 
"스스로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되뇌지 않고서는 계속 나아갈 수가 없다. 그것이 노동 윤리의 철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쇠창살이다... 이 철창에 갇힌 사람은 사실은 자기 없이 학교와 가게, 회사가 돌아갈 수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p.186~187)

이 책은 지은이 자신이 극심한 번아웃을 겪은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토록 원했던 종신교수직을 취득했지만 자신이 소진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비참함을 느끼던 지은이는 게다가 주변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교수직을 그만둔다.

'도대체 번아웃은 무엇인가'라는 간절하고 절박한 질문에서 시작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례를 연구하던 지은이는 번아웃에 대한 올바른 정의조차 없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번아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려 한다거나 심지어는 번아웃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은이 말대로 '피곤은 상품이 될 수 없지만 번아웃은 상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번아웃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지은이는 번아웃의 종말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삶과 베네딕트회 수도사들, 장애가 있는 예술가의 삶 등을 소개한다. 그들의 삶에는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믿는 힘이 있다. 늘 '바쁘다 바빠'를 외치는 현대인의 눈에는 너무 느리고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인간의 존엄이 노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신념을 공유'하는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만든다.

내 주변에도 번아웃을 외치는 사람은 많다. 그럴 때 그저 '많이 피곤하고 지쳤나 보다'라며 개인적인 일로 간과해 버릴 것인가. 번아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노력해서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 중요한 우리의 문제이다. 왜냐. 당신의 번아웃은 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삶이다. 오로지 외부에서 지시한 조건으로는 삶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또한 삶을 얻는 것은 반드시 공동의 노력이어야 한다. 삶만큼 큰 것을 혼자 힘으로 얻을 수는 없다." (p.221)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번아웃의 종말 - 우리는 왜 일에 지치고 쓸모없다고 버려지는가

조나단 말레식 (지은이), 송섬별 (옮긴이), 메디치미디어(2023)


태그:#번아웃, #조나단 말레식,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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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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