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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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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출사ㆍ파면ㆍ투옥ㆍ유배ㆍ해외사절 등 끊임없는 곡절 속에서도 많은 시와 논설ㆍ산문에 이어 소설까지 지었다. 참혹한 죽임과 왕조멸망 때까지 사면이 되지 못함으로써 인멸된 글이 없지 않지만 전해지는 글도 적지 않다. 산문과 논설 중에는 5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살아 숨쉬는 현재성에 이르는 글도 있다.

우선 그는 책 욕심이 많았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노자를 몽땅 털어 책을 사고, 값이 모자라서 수종하는 하인들에게 빌려 책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1616년 1월 연경에서 쓴 「책 욕심 비웃지 말라」이다.

         책 욕심 비웃지 말라  

여러 해 연이어 중국 가는 길 비록 힘들지만 
옛사람 책 많이 얻어 오는 즐거움 있네
가진 것 죄다 털어 책 산다고 비웃지 마오
나는 장차 책벌레가 되려고 하니. 

고향집 왜란 겪고 고서를 다 잃어 
세상에서 보지 못한 책 얻고 싶을 뿐 
여기 와 산 책이 몇 만 권이니 
등불 아래서 글 읽을 만하네. (주석 1)


그의 글쓰기 기본은 자주정신이었다. 유학자들이 당ㆍ송ㆍ명의 명시들을 습작하느라 아류의식에서 허우적일 때 독창성을 제창하였다. 그는 조선의 문인들이 중국 문사들의 글을 모방하고 표절하는 짓을 질타하였다. 「문설(文說)」의 한 대목이다.

당신은 저 몇 문장을 자세히 읽지 않았습니까? 좌씨는 그대로 좌씨이고, 장자는 그대로 장자이며, 사마천과 반고는 그대로 사마천과 반고이고, 한유와 유종원과 구양수와 소동파는 그대로 한유와 유종원과 구양수와 소동파여서, 이분들은 남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저마다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제 소원은 이런 점을 배우는 것입니다. 남의 집 아래 집을 짓고 표절한다는 꾸지람 듣는 일을 저는 부끄러워합니다. (주석 2)
 
'국조시산', 허균이 엮은 시선집. 1706년에 간행된 목판본
 "국조시산", 허균이 엮은 시선집. 1706년에 간행된 목판본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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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작론(詩作論)'은 지금 읽어도 무릎을 칠 정도로 명쾌하다. 시 뿐만 아니라 글쓰기 전반에 걸친 시각이다. 「시는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의 원제 「시변(詩辯)」의 중간 부분이다.

그렇다면 시는 어떠해야 지극한 경지에 나아갈 수 있는가? 먼저 흥취 있게 뜻을 세우고, 다음으로 격조 있게 말을 정하되 구절은 활력 있게, 글자는 원활하게, 음향은 밝게, 마디와 마디의 연결은 긴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소재를 취하여 짜 나가되 올바른 자리를 범해서는 안 되고 겉모습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두드리면 맑은 소리를 울려야 하고, 다가서면 화려하게 빛나야 하며, 내려가면 끝 모를 심연이요, 올라가면 하늘을 향해 훌쩍 뛰어올라야 한다.

닫으면 전아하고도 굳세고, 열면 호방하고 자유분방해야 하고, 풀어 놓으면 생동하며 고무되어야 한다. 쇠를 달구어 금으로 만들고, 썩은 것을 변화시켜 신선하게 만들어야 한다. 평범하고 담박하되 얕고 속됨에 이르지 않고, 기이하고 예스럽되 괴벽에 이르지 않으며, 사물의 형상을 노래하되 사물과 비슷함에 구애되지 않고, 서사를 배치하되 음운과 율격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화려하게 꾸미되 이치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고, 펼치는 논리가 피상적이어서도 안 된다.

비와 흥이 깊으면 사물의 이치와 통하고, 용사가 교묘하면 자기가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격조가 한 편 전체에 나타나면 충만해서 깎아내릴 수 없고, 말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기운이 뿜어져 나오면 드넓어 굴복시킬 수 없다. 이상의 조건을 다 갖추고 나오면 진정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주석 3)


주석
1> 정길수, 앞의 책, 50쪽.
2> 앞의 책, 223쪽. 
3> 앞의 책, 226~22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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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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