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연세대학교

관련사진보기

 
일반인들이 허균을 떠올리면 『홍길동전』을 들 것이고,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는 분은 「호민론」이 생각날 것이다. 특히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등장한 '민중'과 관련, 그의 호민론은 탁월한 민중사상으로 인식되었다.

「호민론」은 그가 마흔 두 살 때인 1610년 명나라에 가는 천추사에 지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자 광해군과 사헌부의 질책을 받고 칩거할 무렵에 지었다. 「호민론」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ㆍ불ㆍ범ㆍ표범보다 두렵기가 더한데, 위에 있는 자가 한창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림은 무엇인가. 대저 이룩된 것만 함께 즐거워하면서, 항상 보는 것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자는 항민(恒民)이다. 항민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발겨지고, 뼛골이 뽑혀지며, 집에 들어온 것과 땅에서 나온 것을 다 내어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면서, 시름하고 탄식하여 윗사람을 탓하는 자는 원민(怨民)이다. (주석 4)

 
허균의 문학정신을 기려서 세운 비
▲ 교산시비 허균의 문학정신을 기려서 세운 비
ⓒ 최원석

관련사진보기

 
「호민론」의 핵심은 물론 호민(豪民)이다. 우리 나라는 고대사회부터 호족계급이 있었다. 대체로 관직을 갖지 않은 부유한 상층민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오늘의 중산층을 의미한다. 삼국시대 호민에 관한 성격이다. 먼저 삼국시대의 호민에 관해 알아본다. 

첫째, 호민은 하호의 상대되는 호부귀자(豪富貴者)로서, 하호가 가난한 민을 의미하는데 비해 호민은 부유한 민을 나타내는 상대 개념의 용어로 사용되었다.

둘째, 호민은 경제적으로 호민전(豪民田)을 기반으로 하여 외적 방비에 필요한 조부의  부족분이나 재난으로 인한 하호의 구휼, 진대를 보조해 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셋째, 호민은 국가의 행정력과 밀착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데, 호민부고(豪民富賈)와 같이  행정력과 연결되어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면도 있다.

넷째, 호민은 관위는 없으나 세력있는 민으로 이해되면서도 그중에는  '하식(卜式)'과 같이 지방행정의 재정적인 조력자로서 관직을 받으며 점차 관료화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다섯째, 호민은 중국의 주변민족에 있어서 경제적인 수취관계에 있어 공납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며 읍락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고, 또한 군사적인 방비를 담당하며 실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서 관작을 받아 신분상승을 해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석 5)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허균 선생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시비
ⓒ 오승준

관련사진보기

 
삼국시대부터 실제했던 '호민'은 고려ㆍ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그 위상이 별로 바뀌지 않았다.  

호족은 신라 말ㆍ고려초에 지방에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행정적ㆍ경제적ㆍ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서, 신라 말ㆍ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세력으로 규정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아울러 호족은 대체로 성주ㆍ장군으로 불리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호족의 개념이 1970년대 이래 현재까지 한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주석 6)

허균은 전통적인 호족의 의미를 호민으로 압축하면서 시대(조선)적 성격을 부여하였다. 그가 제기한 '호민'의 실상이다.

자취를 고깃간에 숨기고 남모르게 딴 마음을 쌓아서, 천지간을 곁눈질하다가 혹여 그때에 사고라도 있으면 그 원(願)을 부리고자 하는 자는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은 크게 두렵다.    

호민은 나라의 사단을 엿보다가 탈 만한 사기(事機)를 노려서,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호창(呼唱)하면 저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모이며, 모의하지 않아도 외치는 것은 같아진다. 항민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호미와 고무래ㆍ창자루를 가지고 따라가서 무도한 자를 죽이게 된다. (주석 7)


그는 역사상의 헌걸찬 호민의 사례를 제시한다.

"진(秦) 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陳勝)ㆍ오광(吳廣) 때문이고, 한(漢)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도 황건적(黃巾賊)이 원인이었다. 당나라도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틈을 타서 난을 꾸몄는데 끝내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모두 백성을 모질게 해서 제 몸을 봉양한 죄과이며, 호민이 그 틈을 타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주석 8)


주석
4> 이익성 편역, 『허균』, 32쪽, 한길사, 1992.
5> 문창노, 「삼국시대 초기의 호민」, 『역사학보』, 제125집, 45쪽, 역사학회, 1990.
6> 정병주, 『신라 말 고려초 호족 연구』, 9쪽, 일조각, 1996.
7> 이익성, 앞의 책과 같음.
8>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 #자유인_허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